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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잡史]<59>유목민의 피가 끓던 ‘백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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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잡史]<59>유목민의 피가 끓던 ‘백정’

김동건 동국대 동국역경원 연구원입력 2018-07-24 03:00수정 2018-07-24 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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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연(野宴)’, 성협풍속화첩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서울의 푸줏간과 여염집에서 불법으로 도살하는 것과 교외(郊外)와 강가 포구의 푸줏간에서 하루에 잡는 소가 몇백 마리나 됩니다. 팔도(八道)를 통틀어 계산하면 하루에 잡는 소가 수천 마리는 될 것입니다.” ―1858년 충청병영계록(忠淸兵營啓錄)


백정은 고려시대 양수척(楊水尺), 화척(禾尺)으로 불렸다. 이들은 버들고리를 만들어 팔거나 사냥, 도축업 따위를 일삼으며 유랑생활을 했다. 몽골의 일족인 달단 등으로 이뤄진 북방 유목민의 후예라는 설도 있다. 세종 때 이르러서야 제민화(齊民化) 정책으로 호적에 편입되어 백정(白丁)이 됐다. 강도나 살인 사건이 일어나 범인을 잡으면 절반은 백정이었을 정도로 많은 범죄를 저지른 데다, 살생을 한다는 이유로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고 갖은 차별만 받았다. 그들은 유목민의 습속으로 인해 농사에는 적응을 못하고 주로 사냥이나 도축업에 종사하면서 ‘소나 돼지를 잡는 사람’으로 의미가 굳어졌다.

백정은 소를 잡는 도축장을 천궁(天宮)이라고 불렀다. 죄를 지어 땅으로 내려온 옥황상제의 아들을 다시 하늘로 올려 보낸다고 믿었던 것이다. 도축은 스님이 독경(讀經)하며 의식을 치르고 엄숙하게 진행됐다. 조선은 소를 중시했다. 장정 10여 명이 할 일을 소 한 마리가 했던 만큼 농사에 반드시 필요했다. 기근이 들면 사람뿐 아니라 소도 크게 줄어들고, 소가 부족해 농사를 망치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조정에서는 소를 잡아먹지 못하게 하는 강력한 우금(牛禁) 정책을 시행했다.

그럼에도 불법으로 소를 잡는 일이 자행됐다. 성균관 노비들이 살던 반촌(泮村)과 서울 안 24곳, 그리고 전국 300여 고을은 관에서 인정된 푸줏간(현방·懸房)이 있었다. 이곳에서 소를 잡아 고기를 팔 수 있었는데, 모두 백정이 소속돼 일을 했다. 소를 잡으면 세금을 납부했으며 고기를 팔 때는 한성부나 관에서 허락한다는 표지를 붙였다. 사사로이 고기를 잡아 팔 때는 과중한 벌금을 징수했다.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농사에 쓸 소 500여 마리가 매일 전국에서 도살된다며 씨가 마르지 않을까 걱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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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소를 많이 잡는데도 씨가 마르지 않은 것은 조선 후기로 갈수록 소의 사육 마릿수가 급격히 늘었기 때문이다. 18세기 후반에는 120만 마리가 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후로도 계속 늘어났다. 그러자 일반 백성들도 백정 일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쇠고기를 팔아 얻는 이익이 매우 컸기에 큰 부자가 된 사람도 속출했다. 지방 수령과 하급 관리는 도살업자와 결탁해 백정을 보호하면서 고기를 얻었고, 심지어 왕손(王孫)이 백정을 동원해 몰래 소를 잡아 고기를 팔다가 발각돼 처벌받기도 했다.

백정은 도축 전문가였으나 그 안에서 세부 전공이 나뉜다. 뼈와 살을 발라내는 거골장(去骨匠)이나 가죽을 제거하는 거모장(去毛匠), 가죽으로 물건을 만드는 피장(皮匠)이 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백정은 사라졌으나 그 차별은 여전했다. 1923년에는 참다못한 백정들이 차별을 없애 달라며 형평운동을 벌였다. 백정은 천시 받았지만 그들 덕분에 조선인은 마음 편히 쇠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김동건 동국대 동국역경원 연구원
#백정#유목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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