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란의 사물 이야기]지도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6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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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 동안 지내러 갈 도시를 소개한 책의 개정판이 나왔기에 구매했다. 수록된 그 나라 전도와 시, 구의 지도들, 그리고 지하철 노선도를 한참 들여다보는데 비스와바 심보르스카의 ‘지도’라는 시가 떠올랐다. “평원과 골짜기는 늘 초록색,/고지대와 산맥은 노란색과 갈색,/가장자리가 찢긴 해안과 맞닿아 있는/바다와 대양은 친근한 하늘색./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조그맣고, 닿을 수 있고, 가깝다.” 그래서인가 지도를 오래 보고 있으면 모든 것이 연결돼 있고 길을 잃고 헤맬 걱정도 없어 보인다. 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잘 아는데도.

지금은 컴퓨터와 옷가지 및 각종 짐을 쌓아놓은 작은방은 결혼해서 출가하기 전까지 막냇동생이 썼다. 부팅시키는 데만 해도 시간이 걸리는 오래된 컴퓨터를 사용하려고 앉아 있다 보면 벽의 절반 정도나 차지하는 세계전도가 눈에 들어온다. 어디서 저런 큰 지도를 구해다 비닐 표구까지 해 놨을까. 지금은 색도 변하고 낡았지만 크기나 형태 때문인지 그래도 세계전도로서의 위풍만은 잃지 않은 듯 보인다. 동생에게 슬쩍 물어보았더니 나중에 세계를 일주해야지, 하는 원대한 마음으로 대학교 1학년 때 그 전도를 붙여 놓았다고 한다.

낯선 도시에 가면 휴대전화로 구글 맵이나 다른 길 찾기 앱으로 모르는 데를 성큼성큼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부럽기도 하다. 어째서인가 나는 방향 감각이 없는 데다 지도도 종이로 된 종류만 간신히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아무리 익숙한 데라도 종이로 된 지도, 교통 노선도는 꼭 챙겨 갖고 다닌다.

‘세계 지도의 탄생’이라는 흥미로운 책에는 지도가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네 가지 요소가 소개돼 있다. 첫 번째는 ‘사상성’인데, 축소가 운명인 지도는 무엇을 그리고 선택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므로 주장하는 바를 피해갈 수 없어서라고 한다. 두 번째는 지도의 표현력과 연관된 ‘예술성’, 세 번째는 정확성을 나타내는 ‘과학성’, 그리고 네 번째는 보는 이의 목적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실용성’. 지도를 보면서 어떤 등고선이나 산과 바다의 입체감이 아름답다고 느끼거나 혹은 떠나고 싶은 충동이 든다면 그건 지도가 갖고 있는 표현의 집적(集積) 때문일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한동안 보고 있던 지도를 접을 때 아, 하고 깨닫게 된다. 이제 떠날 준비가 되었다고. 집으로 돌아올 무렵이면 접힌 데마다 지도의 귀퉁이들은 닳아 있거나 찢어져 있다. 그러나 거기엔 스스로 발견하고 표시해둔 장소들이 점처럼 그려져 있고 그건 어디서도 구할 수 없는 개인의 경험이 모인 또 다른 지표로 남는다. 예술적인 동시에 실용적인. 심보르스카의 “나는 지도가 좋다”라고 시작하는 위의 시 마지막 행은 이렇다. “또 다른 세상을 내 눈앞에 펼쳐 보이니까.”
 
조경란 소설가
#세계 지도의 탄생#지도의 사상성#지도의 예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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