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어떻게?]“어린 손자랑 노는 재미…이젠 밝고 건강한 영화 해보고 싶어”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4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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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개봉 ‘화장’ 이후 휴식하며 새 작품 구상하는 임권택 감독

자신의 얼굴을 음각으로 새긴 동판 앞에 앉은 임권택 감독은 “그동안 찍는 것도, 찍히는 것도 수없이 했지만 여전히 어렵다. 사진을 찍을 때면 자꾸 웃으라고 하는데 잘 안 된다”고 했다. 그가 앉은 디렉터스 체어는 2013년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 회고전의 밤’에서 에르메스가 제작해 증정한 것이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자신의 얼굴을 음각으로 새긴 동판 앞에 앉은 임권택 감독은 “그동안 찍는 것도, 찍히는 것도 수없이 했지만 여전히 어렵다. 사진을 찍을 때면 자꾸 웃으라고 하는데 잘 안 된다”고 했다. 그가 앉은 디렉터스 체어는 2013년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 회고전의 밤’에서 에르메스가 제작해 증정한 것이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8일 오후 찾은 경기 용인시 임권택 감독(82) 자택의 거실에는 키 큰 책장 2개에 유아용 장난감과 그림책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평일이면 손자가 와서 같이 지내거든요. 여기 벽지랑 소파에도 온통 낙서를 해놨지 뭐예요.” 부인 채령 씨의 설명이 뒤따랐다. 늦은 나이에 본 첫 손주라 그런지 임 감독이 직접 어린이집에 데려다 주는 등 각별하다고 했다.

임 감독은 지난해 4월 개봉한 영화 ‘화장’ 이후 별다른 공식 활동 없이 긴 휴식을 갖고 있다. “지난해에는 쓰러져서 응급차에 실려 가기도 했었지. 올해 들어서는 많이 회복했어요. 손자랑 시간을 보내는 게 도움이 돼요. 이제는 괜찮아요.”

손자의 장난감을 제외하고 최근 거실에 새로 들인 물건으로는 그의 얼굴을 음각으로 새긴 동판이 있다. CJ CGV가 지난달 22일 부산 서면 CGV에 ‘임권택 헌정관’을 만들며 선물한 것이다.

임 감독은 처음에 헌정관 제의를 고사했다고 한다. “CJ 같은 대기업들이 1000만 관객 영화만 만드는 거, 영화 질보다는 흥행만을 중심으로 하는 것들이 썩 반갑지가 않았거든. 그래도 헌정관을 통해서 뭔가 독립영화에 보탬을 주겠다, 그 관에서는 좋은 영화만 상영하겠다, 그런 뜻이 있더라고. 헌정관이 한국 영화에 어떤 정신적인 부추김이 됐으면 하는 마음으로 하자고 했죠.”

최근 임 감독이 뉴스에 오르내린 일이 하나 더 있다. 바로 2월 말 부산에서 열린 부산국제영화제 정기총회에 참석해 최근 시와 영화제가 빚고 있는 갈등을 두고 “(정부가) 정말 별것도 아닌 영화를 갖고 편협하게 받아들이는 바람에…”라고 말한 것이 화제가 됐다.

임 감독은 “어떤 영화라도 선정됐으면 도리 없이 상영하는 것인데…. 이전에는 이북 영화도 상영한 적이 있지 않느냐. 그냥 놔뒀으면 ‘다이빙벨’은 그냥 몇 사람만 보고 화제도 되지 않을 영화였지. 이제는 양쪽 다 상처를 입어 감정 문제가 된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세계 영화계의 중요 인사들이 다 오고 싶어 하고 ‘부산에서 보자’는 인사를 할 수 있었던 영화제인데…. 안타깝지”라고 덧붙였다.

임 감독은 한창 영화를 찍을 때는 침대에서 자지 않았다고 한다. 촬영 때의 긴장감 때문인지 늘 소파에서 쪽잠을 자곤 했다는 것이다. 그는 “‘달빛 길어 올리기’(2011년)부터는 많이 지쳤었다”며 “이제는 정신적으로 많이 회복 됐다”고 했다.

“내가 영화 하면서 잘한 것이 하나 있다면, 기왕에 살아온 것에서 벗어나 파격을 살아 보려는 발상을 했고 실제로 행동에 옮겼다는 거예요. ‘서편제’가 그랬지. 정말 위험하기 짝이 없지만, 형편없이 망가지더라도 파격을 통해 나를 변화시키고 싶은, 그런 의욕이 있었어요.”

최근작인 ‘화장’ 역시 전통문화와 역사에 천착해 왔던 그의 작품세계에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고뇌를 그린, 튀는 작품이었다. 그는 ‘화장’을 두고 “‘개인 임권택’이가 몸부림을 쳤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던 영화”라며 “그동안 영화를 하면서 만들어진 내 틀 안에 내가 빠져서 허우적대는 것 같았다. 그 틀에서 빠져나와야 감독으로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시도했던 영화”라고 했다.

팔순이 넘었지만 그는 여전히 새로움을 추구하는 도전자다. “놀고 싶은 영화감독이 어디 있어요.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놀면서 세월 보내다가 죽을 수도 없고. 그러니까 이제 뭔가 밝고 건강한 영화를 한번 해보자 해서 이것저것 기웃거리고 있지. 허허.”

“손자와 시간을 보내는 것이 그런 생각에 영향을 줬느냐”고 묻자 “그럼”이라는 답이 단번에 돌아왔다. 그러면서도 어디서 무엇을 기웃거리는지는 끝내 힌트를 주지 않았다.

“너무 많은 작품을 해 이제는 힘겨워”라고 말하다가도 영화 얘기를 하면 다시 허리를 곧추세우는 임 감독에게 “안주하지 않는 힘은 어디서 나오느냐”고 물었다.

“‘에이, 망해도 좋다!’는 생각이지. 노력하고, 새로운 것을 모색하고, 그러다가 망가진 거야 그 자체가 보람 있는 거 아니겠어.”

:: 임권택 감독이 말하는 ‘내 영화 이력을 보자면’ ::

△초기 “거짓말, ‘뻥까기’ 영화.”

△40, 50대 “영화가 어쨌거나 삶을 담는 그릇인데 거짓말을 너무 많이 해온 데서 오는 부끄러움이 있었다. 그래서 ‘정말’을 하자는 생각으로 질곡을 살아낸 우리 민족의 삶을 주로 그렸다.”

△60, 70대 “세상을 치열하게 보고 영화에 담는 것도 적당한 나이가 있더라. 나이가 들면서는 전통문화의 화석화에 대한 위기감으로 ‘춘향뎐’ ‘취화선’ 같은 영화에 매달렸다.”

△현재 “그동안 너무 큰 덩어리를 해온 것 같다. 덜어내고 싶다. 이제는 벅차다는 느낌이 든다. ‘화장’에서는 개인의 삶 안에서 돌아가는 의식의 추이를 담아보려 했다.”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임권택#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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