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영 기자의 문학뜨락]글쓰기의 첫 단추, 첫 문장의 힘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0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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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욱은 어떤 나쁜 일도 일어날 가능성이 별로 없어 보이는 생을 살고 있었다.’

 강영숙 씨의 새 소설집 ‘회색문헌’에 들어간 단편 ‘불치(不治)’의 시작이다.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단호한 첫 문장은 거꾸로 주인공 진욱에게 일어날 ‘나쁜 일들’을 강렬하게 암시한다.

 2006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터키 소설가 오르한 파무크는 최근 국내에 소개된 에세이 ‘다른 색들’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첫 문장? 바로 그것이 문제다. 첫 문장을 시작하는 것….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하는 것은 그날의 첫 문장을 얼마나 빨리 쓰느냐에 달렸다.”

 그는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조언을 따른다고 고백한다. ‘밤에 아무리 좋은 문장이 떠올라도 종이 위에 옮기지 말고 다음 날 아침으로 미룰 것. 아침에 곧장 글쓰기를 시작할 수 있도록.’

 첫 문장의 중요성은 글을 쓰는 사람들이 입을 모아 강조하는 포인트다. 파무크의 말을 인용하자면, “첫 문장을 쓰고 나면 둘째, 셋째 문장도 저절로 뒤따르기 때문”이다. 첫 문장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음 문장들을 이어 써도 계속 찜찜하지만, 좋은 첫 문장을 쓰면 다음 문장이 술술 풀려 나온다. 그만큼 좋은 작품이 만들어질 가능성이 높다.

 인상적으로 꼽히는 소설의 첫 문장은 뭘까? 문학출판계 인사와 주변 독자들에게 물었다. 많은 지지를 받은 것 중 하나는 김훈 씨의 소설 ‘칼의 노래’의 첫 문장이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작가는 ‘꽃이’로 쓸지 ‘꽃은’으로 쓸지 며칠을 고민했다. 조사 하나 차이지만 ‘이’는 사실을, ‘은’은 의견을 가리킨다면서 고심한 끝에 작가는 ‘사실’을 택했다. 주인공인 장군 이순신에 대한 가치판단이 아닌 사실만을 보여주겠다는 김 씨의 의지가 담겼다.

 정이현 씨의 등단작 ‘낭만적 사랑과 사회’의 첫 문장은 이렇다. ‘나는 레이스가 달린 팬티는 입지 않는다.’ 조건 좋은 남자와 첫 경험을 하겠다는 ‘전략’을 함축한 이 문장으로 정 씨에겐 ‘도발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약자에 대한 먹먹함이 담긴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조세희)의 첫 문장 ‘사람들은 아버지를 난장이라고 불렀다’와 상큼한 연모의 감정이 느껴지는 ‘젊은 느티나무’(강신재)의 첫 문장 ‘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났다’는 첫 문장의 고전이 됐다.

 파무크 수상 뒤 10년이 지나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밥 딜런의 유명한 노래 ‘Knockin' on Heaven's Door’는 이렇게 시작된다. ‘어머니, 이 배지를 떼 주세요(Mama, take this badge off of me).’ 미국 서부 총잡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1970년대 영화 ‘관계의 종말’의 OST이기도 하지만, 반전(反戰)의 메시지로도 읽힌다. ‘어머니’를 부르는 이 첫 구절에 전쟁의 폭력에 대한 저항이 절실하게 담겨 있음은 물론이다.

김지영기자 kimjy@donga.com
#강영숙#회색문헌#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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