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人]영원한 山사나이 엄홍길 대장 “섀클턴 경 생존기 덕에 칸첸중가 올랐다”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12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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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숲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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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이 형, 자요?”

5초쯤? 아니 7초쯤 잠들었을까. 박무택 대원이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란 엄홍길 대장(50)은 빙벽의 튀어나온 바위 턱에 간신히 올려놓았던 엉덩이가 미끄러져 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네를 타듯 몸이 빙벽 밖으로 휘청 나갔다가 돌아왔다. 간신히 바위턱을 찾아 다시 엉덩이를 걸쳤다.

2000년 히말라야 칸첸중가 봉 해발 8000m 지점의 빙벽. 엄 대장과 박 대원은 그렇게 10시간 동안 로프에 매달린 채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밤새 사투를 벌였다. “무택아! 잠들면 죽는다!” 드디어 멀리 동이 터오는 순간, 눈물이 났다. 죽음을 밀어내고 선연히 번져오던 그 빛을 그는 아직 잊을 수 없다.

히말라야 8000m급 고봉 16좌 등반에 성공한 엄 대장이었지만, 2000년 칸첸중가(해발 8586m) 도전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마지막 캠프 진격을 앞두고 셰르파 한 명이 낙빙에 맞아 사망했다. 목숨을 잃은 이를 운구하다 다른 셰르파들과 대원들도 모두 기력을 잃고 의욕을 상실했다. 하루 이틀 사흘…. 베이스캠프에서 엄 대장은 고민을 거듭했다. 포기할 것인가, 대원들을 추슬러 재도전할 것인가. 그러던 중 취재차 원정대를 따라온 기자가 책 한 권을 권했다. ‘살아 있는 한 우리는 절망하지 않는다’(뜨인돌). 1914년 남극 탐험 도중 조난당했던 어니스트 섀클턴 경과 27명의 대원이 537일간 벌였던 생존 투쟁기였다.

“제목부터 딱 끌렸어요. 텐트 속 앉은 자리에서 끝까지 다 읽었어요. 인간의 정신과 육체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1914년 남극에서 벌어진 사건이었지만 내 일처럼 생생했습니다. 엄청난 고통과 극단의 상황에서 단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탈출해 나온 섀클턴 경의 리더십에 고개를 숙였습니다. 나도 동료를 한 명 잃긴 했지만, 아직 도전을 포기할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죠.”

이 책을 읽고 용기를 낸 엄 대장은 결국 박무택 대원(2004년 에베레스트 산에서 사망)과 함께 재도전에 나서 칸첸중가 등반에 성공했다. 엄 대장은 “지금도 이 책을 보면 당시의 상황이 그림처럼 떠오른다”고 말했다.

“히말라야 16좌 원정을 떠날 때마다 배낭에 책을 너덧 권씩 넣어갑니다. 정상 부근의 날씨가 안 좋으면 베이스캠프에서 2, 3일간 무작정 대기할 때가 많아요. 그러면 대원들은 목욕도 하고, 빨래도 합니다. 식당, 휴게실로 쓰는 텐트에는 대원들이 각자 가져온 책을 쌓아놓고 돌려 봅니다. 삼국지 만화책 세트를 1권부터 밤새워 읽은 적도 있어요. 가장 좋아하는 책은 도전이나 탐험에 관련된 책과 명상 책입니다.”

엄 대장에게 산은 영원한 멘토이자 스승이다. 산은 늘 그에게 겸손할 것을, 낮춰야 한다는 내면의 깨달음을 주었다. 그는 “산에 올라가서 세상을 내려다보지 말고, 세상을 올려다보는 법을 배웠다”고 말했다.

“이해의 진정한 뜻은 ‘아래에 선다는 것’(Under-Stand)”입니다. 산에 오르면 산이 안 보이지만, 산 아래 서야 비로소 산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려면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서야 하고, 부부 사이에 대화하려면 서로를 낮춰야 합니다. 산은 오르는 것도, 정복하는 것도 아닙니다. 경외감과 겸허함으로 그 아래에 서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1985년 히말라야에 첫발을 디딘 이후 엄 대장에게 셰르파는 형제와 같은 존재였다. 셰르파는 티베트 고원에서 살다가 네팔로 넘어온 고산족을 일컫는 말. 에베레스트 인근 쿰부지역에 사는 이들은 평생 거대한 설산을 보고 살아와서인지 자연에 대한 경외심과 뿌리 깊은 불교신앙을 갖고 있었다. 그는 셰르파들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용서’(오래된 미래)를 비롯한 달라이 라마의 책을 읽고 또 읽었다.

“티베트(중국)와 네팔의 국경에는 해발 6000m가 넘는 험준한 ‘낭파라’ 고개가 있어요. 달라이 라마를 친견하기 위한 순례객, 목숨을 걸고 중국을 탈출하는 사람, 티베트와 네팔을 오가며 물물교환을 하는 상인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지요. 거대한 설산을 배경으로 대상행렬들이 야크를 몰고 눈길을 헤쳐 나가는 모습을 보면 한편의 장대한 서사시 같아요. 인간과 자연, 종교와 문명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2007년 히말라야 16좌 완등을 마친 엄 대장은 ‘엄홍길휴먼재단’을 세웠다. 그동안 함께 산에 오르면서 목숨을 잃었던 동료, 셰르파들에게 받았던 도움을 돌려주기 위한 것이다. 그는 2009년부터 네팔 히말라야의 오지마을에 초등학교 16개를 건립하고 있다. 그레그 모텐슨이 쓴 ‘세 잔의 차’(이레)라는 책을 읽은 것이 계기였다. 이 책은 K2를 등정하다 조난당했던 등반가가 히말라야 산골마을 주민들의 도움으로 구조된 후 수많은 사람에게서 기부를 받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지역에 학교 80여 개를 짓는 기적을 그린 실화다.

엄 대장은 “지난달 친동생처럼 생각해왔던 박영석 대장의 죽음을 접하고 몸 한쪽이 떨어져나가는 아픔을 느꼈다”며 “왜 누군 죽고, 나는 살아남았는가라는 생각에 잠겼다”고 말했다.

“법정 스님의 ‘홀로 사는 즐거움’에 보면 티베트에서 중국의 침략을 피해 장비도 없이 맨몸으로 히말라야를 넘어온 80세 노스님 이야기가 나옵니다. 기자들이 놀라서 ‘어떻게 오셨느냐’고 묻자 스님은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서 왔다’고 대답했습니다. 저도 8000m를 오르내릴 때마다 한 걸음의 위대함을 생각했어요. 산에 함께 오르던 친구들이 못다 이룬 꿈을 이루기 위해, 산이 제게 베풀어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저도 한 걸음씩 내디딜 생각입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 엄홍길 대장 추천 도서

◇살아 있는 한 우리는 절망하지 않는다/알프레드 랜싱 지음/뜨인돌

1914년 남극 횡단 탐험에 나선 어니스트 섀클턴 경과 대원 27명의 537일간의 도전을 다룬 실화. 극한 상황 속에서도 자신에 대한 믿음과 타인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는 휴머니즘에 관한 이야기.

◇세 잔의 차/그레그 모텐슨 지음/이레

K2 등정에서 조난을 당했다가 히말라야 산골마을 사람들과 차 세 잔을 마시고 가족이 되어 80여 개의 학교를 세운 등반가의 감동 실화. 지금까지 3만 명이 넘는 아이가 교육을 받았으며, 그와 지지자들의 열정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용서/달라이 라마/오래된 미래

‘용서’는 달라이 라마가 40년 넘게 벌이고 있는 비폭력 평화 운동. 이는 티베트 독립운동의 정신을 넘어 전쟁과 폭력으로 가득한 현대 사회에 전하는 메시지이며, 개인의 삶에서 진정한 행복의 길로 인도하는 마음의 수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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