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희윤 기자의 싱글노트]주여, 제 말이 들리십니까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5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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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5월 7일 화요일 맑음. 탈출 마술
#313 Damien Rice ‘Cold Water’(2002년)

자, 여기 또 하나의 부서진 할렐루야가 있다.

‘2002’란 노래로 우리나라에서 무서운 뒷심 인기를 모은 영국 가수 앤마리를 얼마 전 만났다. 그는 2002년 가장 기억에 남는 추억으로 세계 가라테 선수권 우승을 꼽았다. 나에겐 아일랜드 싱어송라이터 데이미언 라이스의 데뷔 앨범 ‘O’ 하나로 족하다.

영화 ‘클로저’(2004년)에 실린 곡, ‘The Blower‘s Daughter’로 가장 유명한 이 음반은 어긋나고 부서져 쳇바퀴 돌 듯 반복되는 관계에 대한 얘기다.

야외 재즈 축제의 계절이 오니 몇 년 전 라이스가 그 무대에 섰던 일이 기억난다. 까만 밤이었다. 조금씩 흩뿌리던 가랑비가 점점 굵어졌다. 몇몇 관객은 아예 우산을 꺼내들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통기타 한 대만 덜렁 들고 나와 1인극 같은 공연을 이어가던 라이스가 문득 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Cold, Cold water… surrounds me now….’

‘O’에 실린 ‘Cold Water’다. 노래 속 사내는 절박하다. 가사라곤 그저 이런 문장의 반복이다. ‘차가운 물이 나를 에워싸/내게는 당신 손뿐/주여, 내 말이 들립니까/아니면 난 버려진 건가요?’

탈출 마술을 다룬 영화 ‘프레스티지’(2006년)가 떠오른다. 물속에 갇혀버린 채 묵음으로 외치는 이의 일그러진 표정. 그러나 이 노래의 구조 요청은 터무니없이 느린 템포다. 가녀린 나뭇가지처럼 흔들리는 통기타 리듬, 떨듯이 속삭이는 목소리. ‘살려 달라!’는 갈급한 외침을 이렇게 길게 늘일 사람은 아무도 없다. 따라서 이 사내는 글자 그대로 물에 빠진 것은 아니다.

이 곡은 앨범 전체를 축약한 알약이다. 화성과 선율 진행에서는 ‘Amie’와, 혼성듀엣의 대화 형식과 가사에서는 ‘The Blower’s Daughter’와 이어진다.

그러고 보면 음반 제목의 ‘O’는 숫자도 알파벳도 아닌지 모르겠다. 동그라미. 슬픔과 어리석음의 탈주로 없는 폐쇄 궤도. 그 안에 구세주는 없다. 탈출을 자신했던 마술사는 이제 4분 50초짜리 물의 관에 갇힌 신세. 저주받은 그는 영원히 갈구한다. 동상처럼 굳어진 고통의 성화(聖畵)가 된다.

‘차가운 물이 날 에워싸/내게는 당신의 손뿐/주여, 내 말이 들립니까/나는 버려진 건가요?’

임희윤 기자 imi@donga.com
#2002#앤마리#클로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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