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에 만나는 詩]거친 인생의 무게가 박힌 아내의 손가락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0월 4일 03시 00분


코멘트
사람의 손은 그의 일생을 말해주는 또 하나의 얼굴이다. 하얗고 긴 손가락에는 고생 모르고 자란 백면서생의 물정 모름이, 까맣게 기름때가 낀 손톱이나 굳은살 박인 손바닥에는 육체노동의 고단함이, 화려한 매니큐어가 내려앉은 손톱에선 삶의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여기 아내의 손이 있다. 결혼한 지 수십 년이 지나도록 모르고(실은 외면하고) 살다가 어느 날 문득 눈길을 준 아내의 손은 관절염 때문에 손가락 마디마다 퉁퉁 부어있다. 주먹이라도 쥘라 치면 굵어진 손마디가 줄줄이 이어져 염주알이 따로 없다. 결혼식 예물이던 금가락지도, 환갑 기념이라며 자식들이 맞춰준 보석 반지도 도저히 낄 수 없는 거친 손이다.

이달에 만나는 시 10월 추천작으로 공광규 시인(53·사진)의 ‘손가락 염주’를 선정했다. 등단한 지 27년 된 시인이 낸 여섯 번째 시집 ‘담장을 허물다’(창비)에 실렸다. 추천에는 이건청 장석주 김요일 이원 손택수 시인이 참여했다.

류머티스 관절염 때문에 손가락 마디가 굵게 변형된 시골 노인의 손을 찍은 사진을 본 것이 시상이 됐다. 시인은 “평생 거친 논일 밭일을 마다않은 시골 노인 중에는 실제로 관절염 때문에 손마디가 대단히 굵은 분이 많다”며 “시부모 봉양에 자녀 육아에 아내의 손이 망가지는 줄도 모르고 살다가 우연히 이를 알게 된 시적 화자가 느꼈을 안쓰러움과 미안함을 담았다”고 말했다.

굵어진 손마디의 은유로 불가에서 염불을 외울 때 쓰는 염주를 사용한 이유도 설명했다. “염주는 번뇌를 잊고 싶을 때 쓰는 불구(佛具)입니다. 시에 등장하는 아내의 지난 인생이야말로 번뇌의 연속 아니었을까요. 사실 삶 그 자체가 번뇌의 덩어리입니다만….”

추천위원 이건청 시인은 “공광규의 시집은 일상과 타성을 넘어선 곳에서 발견되는 새로운 정신풍경들을 보여준다. 서로 다른 사물과 사물, 사물과 일상사의 결합 속에 자신의 체험을 능숙하게 실어낸다”고 추천 이유를 밝혔다. 김요일 시인은 “겸손한 언어와 비범한 환유를 통해 깊게 응시한 자만이 그려낼 수 있는 따스한 생의 진경을 펼쳐 보인다”고 평했다.

장석주 시인은 송재학의 시집 ‘날짜들’(서정시학)을 추천했다. 그는 “송재학의 시는 경도(硬度)의 미학이라는 측면에서 누구도 견줄 수 없는 자리에 도달해 있다고 생각해 왔는데, 이번 시편들은 작아지면서 더욱 단단해진 게 인상적이다”라고 했다. 손택수 시인의 선택은 이병률의 시집 ‘눈사람 여관’(문학과지성사)이었다. 손 시인은 “일상에 지친 시도 이병률을 만나면 여행자가 된다. 이 시집은 여행의 수고로움을 짐진 자들이 머무는 여인숙이다”라고 평했다. 이원 시인은 이영광의 시집 ‘나무는 간다’(창비)를 추천했다. 이원 시인은 “이영광이라는 뜨거운 정신은 절망마저 허락하지 않는 결박의 몸을 선택했다. 이 희생제의는 깊고 새로운 리얼리즘을 발명해내기에 이른다”고 밝혔다.

우정렬 기자 passion@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