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헌의 가인열전]<18>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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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1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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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간 女心 흔든 ‘희야’

캐리커처 최남진 기자 namjin@donga.com
캐리커처 최남진 기자 namjin@donga.com
1980년대 언더그라운드 붐의 가장 그늘진 곳, 헤비메탈 밴드 문화는 소수 극렬 마니아들의 불타는 열광에도 불구하고 오버그라운드 진출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이 밴드들은 이후 한국 대중음악을 호령하게 될 위대한 보컬리스트들을 배출한다. 이승철은 이 밴드 무브먼트 속에서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몇 안 되는 밴드 중 하나인, 부활의 리드 보컬리스트로 25년이 넘는 기나긴 음악 여행을 시작했다.

1986년 부활의 데뷔 앨범 머리곡 ‘희야’는 당시 언더그라운드 밴드가 분만한 최대의 히트곡이었지만 이승철로 하여금 밴드의 리더인 기타리스트 김태원에게서 벗어나게 하는 계기도 제공했다. 그는 2집을 끝으로 밴드를 탈퇴하고 1988년 서울대 음대 출신의 작곡가 박광현이 쓴 ‘안녕이라고 말하지 마’로 ‘희야’를 능가하는 솔로 데뷔곡의 신화를 만든다. 그는 스물다섯도 채 되기 전에 록 보컬리스트로서의 에너지와 발라드 싱어로서의 풍부한 감정이입, 그리고 견고한 발성과 정교한 호흡의 세기를 구비한 완성된 보컬리스트였고 소녀 팬들의 아우성을 몰고 다닌 아이돌 스타였던 것이다.

이때만 해도 이승철은 절정의 권좌에서 서서히 상왕의 지위로 물러서고 있던 조용필의 후계자로 책봉되는 것이 거의 명백해 보였다. 그러나 1989년 가을에 터진 대마초 파문은 순식간에 그의 모든 것을 허물어뜨렸다. 노태우 정권 시절 ‘범죄와의 전쟁’ 분위기에서 그는 방송 출연금지라는 단죄를 받았고 이후 거의 5년 동안 브라운관에서 추방되고 말았다.

절정의 청년 스타에서 하루아침에 모멸의 대상으로 전락한 그에게 허용된 유일한 출구는 라이브 콘서트 무대였다. 그리고 이 위기는 1970년대 후반 조용필이 그랬듯이 이승철에게도 오로지 무대에서의 음악적 감동만이 자신을 존립하게 만든다는 평범한 진리를 실현하게 해주는 반전의 기회로 승화된다. 역설적으로 말한다면 콘서트로의 추방이야말로 1990년대 댄스뮤직의 광풍과 2000년대의 한류 아이돌 그룹 붐 속에서 기존의 스타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갈 때 이승철로 하여금 음악 그 자체의 가치를 수호하는 수문장으로 남게 하였으며, 공연장에서 깊숙이 다져진 팬들의 연대감은 시간이 흘러도 그를 떠나지 않는 원동력이 되었다.

록 보컬리스트로서의 에너지, 발라드 싱어로서의 풍부한 감정, 견고한 발성을 모두 지닌 이승철. 동아일보DB
록 보컬리스트로서의 에너지, 발라드 싱어로서의 풍부한 감정, 견고한 발성을 모두 지닌 이승철. 동아일보DB
대마초 파문과 이혼 같은 개인적인 비극은 그의 음악적 성숙을 훼손하지 못했다. 그는 모든 방향으로 타구를 날릴 수 있었던 장효조처럼 음악적 스펙트럼을 다양하게 넓히는 한편 피상적인 기교를 넘어 음악적 공감을 창출하는 여백과 침묵의 아름다움을 심화시켰다. 비록 돋보이는 히트곡을 내지 못했지만 한국적 정서를 바탕으로 흑인음악의 정수를 추출해낸 1994년의 네 번째 앨범 ‘The Secret of Color’는 뮤지션으로서 그의 개화를 알리는 명작이다.

그리고 그에게 도약의 발판을 마련해 주었던 부활과 재회해 발표한 ‘네버엔딩 스토리’(2002년)는 2000년대의 이승철에게 또다시 비상의 날개를 달아주었다. 극심한 애증의 감정이 교차하는 김태원과 이승철의 만남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황홀한 불멸의 순간을 창조해낸다. 이 장면은 아마도 2000년대 한국 대중음악사가 연출한 최고의 명장면 중 하나일 것이다.

이 노래를 기점으로 이승철은 더 온화하고 윤택한 미디엄 템포의 사랑의 명작들을 연이어 발표한다. 전해성, 이현승, 조영수, 홍진영 같은 2000년대 신예 작곡가들과 함께한 ‘긴 하루’(2004년) ‘열을 세어 보아요’(2005년) ‘소리쳐’(2006년)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2009년) 같은 노래들은 불혹의 고개에 다다른 이승철의 또 다른 버전의 진화였다. 특히 시인 원태연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슬픔보다 더 슬픈 이야기’의 삽입곡인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는 앙증맞은 걸그룹이나 애크러배틱한 어린 보이그룹들이 보여줄 수 없는 고요한 사랑의 시정을 담담하게 묘파한, 이승철이 긴 세월 동안 풍상을 겪으며 도달한 하나의 득음의 비경을 보여준다.

스타덤의 절정에서 한순간에 사라져버릴 수 있다는 공포를 넘어 이승철은 여기까지 도달했다. 그리고 그가 앞으로 걸어갈 길 역시 ‘네버엔딩 스토리’일 것임은 의심의 의지가 없다.

강헌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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