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헌의 가인열전]<5>박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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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8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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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녀린 요정의 ‘치명적 유혹’… 청중은 폭풍 속으로

《세이렌은 영혼이 깃든 감미로운 목소리로 항해 중인 선원을 섬으로 유혹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는 그리스 신화의 바다의 요정이다. 뮤즈 멜포메네와 강의 신 아켈로스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 상반신은 여자이고 하반신은 새의 모습을 하고 있다. 150cm가 될까 말까 한 가녀린 몸이지만 그가 입을 여는 순간 청중은 세대를 가리지 않고 단숨에 그가 펼치는 마술의 포로가 된다. ‘나는 가수다’의 최고의 히트 상품은 임재범이지만 이 TV 프로그램의 진정한 단 한 명의 영웅은 1998년 태평양을 건너와 한국 대중음악계에 데뷔한 세이렌, 박정현이다.》

그는 음악 자체의 매혹을 일관되게 붙들어 왔다. 어느새 30대 중반을 넘어선 디바 박정현의 폭풍질주가 당연한 이유다. 동아일보DB
그는 음악 자체의 매혹을 일관되게 붙들어 왔다. 어느새 30대 중반을 넘어선 디바 박정현의 폭풍질주가 당연한 이유다. 동아일보DB
그는 부활의 ‘소나기’에서 조수미의 ‘나 가거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노래를 자신의 오리지널처럼 신들린 듯이 소화하며 21세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디바로 다시 태어났다. 2011년 상반기를 강타한 ‘나는 가수다’에 출몰했던 수많은 노래의 향연 가운데 압권인 장면을 단 하나만 꼽으라면 나는 1초의 주저함 없이 박정현이 조용필의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를 불렀던 순간을 지목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박정현의 진면목을 올곧게 발견하기까지는 13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는 언제나 노래와 함께 있었지만 캘리포니아 태생의 한국계 미국인이며 컬럼비아대에서 문학을 전공한 그는 한국에서 가수로 뿌리내리기까지 만만치 않은 시련의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그의 데뷔 앨범 ‘Piece’(1998년)는 1990년대 한국 여성 뮤지션의 데뷔 앨범 가운데 첫머리에 놓이는 수작일 뿐 아니라 대중성과 음악성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앨범이었다. 이제는 한국 리듬앤드블루스(R&B)의 고전이 된 ‘나의 하루’와 한국의 머라이어 캐리라는 애칭을 안겨준 ‘P.S. I Love You’, 그리고 임재범과 입을 맞춰 지난 20년간 최고의 혼성 듀오 곡으로 여전히 위용을 잃지 않는 ‘사랑보다 깊은 상처’를 담은 앨범이다. 그러나 그 성공의 이면에는 한국의 물정을 몰랐던 그가 엉성한 매니지먼트 계약 때문에 데뷔하기까지 고시원을 전전해야 했던, 이방인의 우울하고 막막했던 시간이 녹아 흐르고 있다.

윤종신 유희열 김윤아 정석원 같은 1990년대의 명석한 아티스트군단의 어시스트를 받은 박정현은 ‘몽중인(夢中人)’과 ‘편지할께요’를 담은 두 번째 앨범(1999년)부터 그의 디스코그래피 사상 최대 성공작 가운데 하나인 네 번째 앨범 ‘Op.4’(2002년)에 이르기까지 적어도 음악적으로는 질풍 같은 진군을 계속한다. 특히 015B의 정석원이 프로듀서를 맡은 네 번째 앨범의 ‘꿈에’와 ‘미장원에서’를 통해 박정현은 단순한 성숙을 넘어 완벽하게 설계된 노래의 감동을 드라마틱하게 조형해낸다.

하지만 시대는 이제 ‘디바’의 편이 아니었다. 음반산업은 더는 바닥을 칠 수 없을 정도로 붕괴됐다.

앨범을 발표한다는 것으로 아무런 의미를 소통할 수 없는 암담한 시간 속에서 박정현은 그래도 음악의 진정성을 신봉하는 소수의 수용자가 4집과 더불어 최고의 명반으로 지목하는 5집 ‘On and On’(2005년)을 발표하지만 이 앨범은 대중적 무관심의 쓰레기통에 처박힌다. 이 앨범의 말미에 자리한 ‘하비샴의 왈츠’는 ‘미아’와 더불어 5분 내외의 노래 한 곡 안에서 한 편의 영화를 창조하는 박정현의 뛰어난 보컬 형상화 능력이 최고조로 발휘된, 저주받은 명장면이다.

박정현의 노래를 관통하는 일관된 주제는 사랑의 상실, 혹은 이루어질 수 없는 짝사랑의 안타까움이다. 2000년대 중반 이후 ‘가수’가 ‘아티스트’가 사라져 가는 어두운 터널을 박정현은 노래에 대한 변함없는 짝사랑의 힘만으로 묵묵하게 돌파한다. 그는 세상이 뭐라 하든 앨범을 꼬박꼬박 발표했으며(2009년의 7집 ‘눈물이 주룩주룩’을 들어보시라)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은 콘서트를 지속적으로 수행했다.

2011년 어느새 30대 중반을 넘어선 박정현의 폭풍질주는 결코 변덕스러운 대중의 트렌드가 기획한 우연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음악 자체의 매혹을 믿는 영원한 음악 소녀의 짝사랑이 낳은, 슬프도록 당연한 기적이다.

2005년 류승완 감독의 영화 ‘주먹이 운다’의 마지막에 삽입된, 7080세대에겐 ‘비바람이 치는 바다…’로 익숙한 뉴질랜드 원주민의 노래 ‘포카레카레 아나’가 들려온다. 우리가 이 노래를 부르는 박정현의 치명적인 매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선 오디세우스처럼 귀를 막고 돛대에 몸을 묶어야 할 것이다.

강헌 대중음악평론가
캐리커처 최남진 기자 namjin@donga.com
캐리커처 최남진 기자 namj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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