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역사를 따라 문화를 따라]<6>삼국유사의 길-신화를 다시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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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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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연스님의 혼, 대한해협 두 번 건넌 뒤 제 땅의 빛을 보다



《일본 도쿄에서 서남쪽으로 신칸센 기차를 타고 달리면 1시간 50분 정도 걸리는 나고야는 막부시대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도시다. 13일 찾은 이곳의 날씨는 맑고 포근했다. 역에서 버스를 타고 다시 20여 분. 한적한 주택가에 도착했다. 골목길을 따라 들어가자 호사(蓬左)문고가 눈에 들어왔다. 600년이 넘은 고서 11만 점을 소장한 곳답지 않게 수수한 모습이 오히려 인상적이었다. 도쿠가와 미술관과 함께 있는 호사문고는 에도막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가문이 소유했던 장서들을 보관하고 있는 곳이다. 평소 책읽기를 즐겼던 도쿠가와는 아홉 번째 아들 요시나오(義直)에게 3000권의 책을 물려줬다. 도쿠가와 가문은 1950년 모든 책을 나고야 시에 헌납해 이후 시가 관리하고 있다.》

군위에서 경주로
1280년경 군위서 발간
조선시대 관심 밖으로 밀려 1512년 경주서 다시 찍어

나고야에서 교토까지
조선책 유난히 아낀 도쿠가와
임란때 전리품으로 챙겨와 日 황실에 빌려주기도

도쿄에서, 또 서울에서
도쿄제대 1904년 근대本 펴내
당시 日 유학갔던 최남선 서울 돌아와 1927년 전문 소개


○ 삼국유사와 대면하다


현대식으로 산뜻하게 단장된 호사문고에 들어서자 공기가 달랐다. 수백 년 된 고서들 때문에 습도와 온도관리에 각별히 주의하기 때문이다. 삼국유사 열람을 신청하자 관리인이 알코올로 손을 소독하고 손목시계까지 풀라고 말한다. 책이 시계에 걸려 파손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목욕재계하는 기분으로 손을 씻은 후 설레는 마음으로 앉자 관리인이 조심스럽게 삼국유사를 펼쳐 보여줬다. 상자를 열고 다시 특수 제작한 커버를 벗기자 삼국유사 2권이 모습을 드러냈다. 책장을 넘겨보니 글자 한 자 한 자가 또렷하다. 찍어낸 지 500년이 지난 책이라고 믿기지 않았다. 특별한 보관방법이 있는지 물어보자 나카시마 다케히코(中島雄彦) 학예원은 “가능한 한 만지지 않는 게 가장 좋은 보관법”이라고 대답했다. 얼른 책에서 손을 뗐다.

16세기 말 일본으로 건너온 삼국유사를 이렇게 마주하자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이동을 한 느낌이 들었다. 어떤 이유로 삼국유사가 지금 이곳에 있을까.

○ 전란의 혼란 속에 일본으로

일연이 삼국유사를 펴낸 것은 1280년경. 고려 충렬왕 때다. 경북 군위에 있는 인각사에 기거하면서 책을 집필했다. 삼국유사는 왕조 중심의 역사서와는 다른 ‘생활의 역사’였다. 왕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야기가 실렸다.

동국여지승람 같은 인문지리서에 인용된 것으로 봐 조선 초기에는 널리 읽힌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성리학의 영향이 점점 커지면서 승려가 쓴 삼국유사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었다.

자칫하면 묻혀버릴 수도 있던 상황에서 1512년(중종 7년) 삼국유사는 새 생명을 얻는다. 경주 부윤(府尹) 이계복이 삼국유사를 다시 찍어낸 것이다. 쉬운 작업은 아니었다. 주변 마을에 수소문을 해 완전한 형태의 삼국유사를 찾아내는 데 적잖게 품이 들었다. 그해 12월 삼국유사를 펴내면서 이계복은 발문(跋文)을 붙였다.

“아, 물건이란 오래되면 반드시 없어지게 마련이고, 없어지면 반드시 일어나게 마련이니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없어졌다가 일어나는 것이 당연한 이치다. 후세의 학자들은 이러한 이치를 알아 때로 일으켜 영원히 전할 것을 역시 후세의 학자들에게 바란다.”

그로부터 80년이 지난 1592년, 임진왜란이 터졌다. 7년의 전쟁 끝에 왜군은 수많은 전리품을 챙겨 일본으로 돌아갔다. 여기에 삼국유사가 포함됐다. 일본으로 건너간 삼국유사를 비롯한 많은 책은 실력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헌상됐다.

조선의 책들을 각별히 아꼈던 도쿠가와는 1616년 숨지기 전 아들들에게 책을 나눠줬다. 삼국유사는 오늘날의 나고야인 오와리(尾張) 번의 번주로 있던 요시나오에게 갔다. 그는 문고를 만들어 물려받은 책을 관리했다. 호사문고의 시발점이 된 것이다.

○ 일왕에게 빌려준 귀중한 책

고려 충렬왕 때 삼국유사를 펴낸 일연. 동아일보 자료 사진
고려 충렬왕 때 삼국유사를 펴낸 일연. 동아일보 자료 사진
오와리 번이 삼국유사를 어떻게 대접했는지는 1624년 있었던 일화에서 잘 드러난다. 그해 교토의 고미즈노오(後水尾) 왕에게 책 32종을 빌려줬는데 그 가운데 삼국유사가 포함됐던 것이다. 도쿠가와 집안은 황실에 빌려줬다가 돌려받은 책들을 ‘금중(禁中·왕의 궁궐)에 빌려 드린 서적’이라고 해서 각별히 챙겼다. 그 덕에 도쿠가와 집안의 부침에도 삼국유사는 변함없이 온전한 형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삼국유사는 ‘교토 나들이’를 다녀온 뒤 줄곧 나고야에 있다가 다시 한번 운명적 이동을 하게 된다. 1904년의 일이다.

1889년 ‘국사학과’를 새로 설치한 도쿄(東京)제국대는 2년 뒤 쓰보이 구메조(坪井九馬三) 교수 취임을 계기로 교재편찬 작업에 착수했다. 그는 에도시대 자료를 중심으로 ‘문과대학 사지총서’라는 이름 아래 책을 간행하기 시작했다. 삼국유사는 그 총서에 포함되면서 1904년 근대 활자로 부활했다.

그때 발행된 삼국유사 한 권이 현재 도쿄대 한국조선문화연구실에 보관돼 있다. 15일 도쿄대를 방문했다. 사지총서본 삼국유사 앞 장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 있다. “일본에 있는 삼국유사 2권은 모두 16세기 초에 간행된 것으로 한 권은 호사문고에, 다른 한권은 간다(神田) 가문에 보관돼 있다.”

삼국유사 전문가인 고운기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는 “에도시대 사료를 집중적으로 찾던 쓰보이 교수에게는 ‘궁중에 빌려 줬던 책’이라는 메모와 함께 있는 도쿠가와 집안의 삼국유사가 크게 눈에 띄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 제 땅의 햇빛을 다시 보다

삼국유사는 이처럼 1904년 일본에서 근대식 활자본으로 다시 태어났다. 하지만 한국에선 아직 삼국유사에 대한 조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이계복의 말처럼 ‘이치를 알아 때로 일으켜 영원히 전할 후세의 학자’가 나타나야 했다.

이계복의 염원을 이룬 것은 최남선이었다. 그는 도쿄제국대가 삼국유사를 발간한 1904년 일본에 유학했다. 첫 유학은 석 달 만에 끝났고 1906년 다시 일본에 건너가 지리 역사를 배웠다.

한국으로 돌아와 고전 연구에 심혈을 기울인 최남선은 묻혀 있던 고전을 발굴하는 일을 주도했다. 그 노력의 결실 가운데 하나가 삼국유사였다. 그는 1927년 잡지 ‘계명’에 삼국유사 전문을 실었다. 고운기 교수는 “최남선은 계명에 삼국유사를 소개하면서 1904년 도쿄제대본과 1925년에 나온 교토제대본의 서문을 함께 실었다”면서 “두 책을 다 참고했다는 얘기지만 연도 차이를 볼 때 도쿄제대본을 먼저 봤을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고 교수의 설명대로라면 일연이 펴낸 삼국유사는 1512년 경주에서 다시 인쇄된 뒤 415년 만에 다시 한국에서 햇빛을 본 것이다. 해제에서 최남선은 “백천금이라도 구하기 어렵던 이러한 진서(珍書)를 싸고 쉽게 보게 됨을 기쁘게 생각하시는 이는 청컨대 계명구락부 당사자의 아름다운 뜻을 고맙게 알아주시옵소서…이 귀중한 고사(古史)가 이제는 누구든지 손쉽게 고람(考覽)하게 되는 것만을 다행으로 하여…”라고 썼다. 이후 국내 곳곳에 전해져 내려오던 삼국유사의 여러 판본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쓴 인각사를 22일 찾았다. 국사전 명부전 산령각과 요사채 건물만 있을 뿐 담장도 없었다. 복원공사를 준비 중이어서 다소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쓸쓸함마저 감돌았다. 국사전 옆에는 일연의 생애를 보여주는 아담한 ‘일연선사생애관’이 있고 그 앞에는 ‘일연찬가’를 새긴 기념비가 있다.

일연은 삼국유사를 쓰면서 짐작이나 했을까. 세상이 바뀌어 삼국유사의 처지도 바뀌고, 더 나아가 대한해협을 두 번 건너는 곡절을 겪게 될 운명이었다는 것을.

도쿄·나고야=김창원 특파원 changkim@donga.com

군위=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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