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역사를 따라 문화를 따라]<4>연행사의 길 - 사진과의 첫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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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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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이하다! 무슨 술법인가”… 서양 新문명에 ‘찰칵’ 눈 뜨다

1863년 중국 베이징 러시아공사관에서 러시아 사진가가 이항억 등 조선 연행사 일행을 촬영한 사진. 한국인을 모델로 한
최초의 사진이다. 낯선 사진과의 첫 만남이었지만 이들 연행사 일행의 포즈는 자연스럽고 세련됐다. 이 사진은 영국으로 갔다가
2008년에야 우리에게 알려졌다. 사진 제공 박주석 명지대 교수
1863년 중국 베이징 러시아공사관에서 러시아 사진가가 이항억 등 조선 연행사 일행을 촬영한 사진. 한국인을 모델로 한 최초의 사진이다. 낯선 사진과의 첫 만남이었지만 이들 연행사 일행의 포즈는 자연스럽고 세련됐다. 이 사진은 영국으로 갔다가 2008년에야 우리에게 알려졌다. 사진 제공 박주석 명지대 교수
《“아침 식사 후 판관 박명홍, 오상준과 함께 아라사관(俄羅斯館)을 구경하러 갔다.…안으로 들어가니 벽 위에 사람이 차례로 앉아 있는데, 의관이 선명하고 기상이 단정했다. 가까이 다가가 보았더니 바로 화상(畵像)을 벽에 걸어놓은 것이었다. 틀림없이 살아있는 사람으로 보이는데 어떻게 사람을 그렸다고 생각하겠는가?”(이항억의 ‘연행초록’에서) 1863년 1월 28일(음력) 오후 청나라의 수도 연경(燕京) 도심 한복판의 아라사관. 연경은 지금의 베이징(北京)을, 아라사관은 러시아공사관을 가리킨다. 이곳을 찾은 이항억 등 조선 연행사(燕行使) 일행은 벽에 붙은 그림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어떻게 저리도 똑같을 수 있단 말인가. 저게 대체 뭐란 말인가.’ 이들은 호기심을 억누를 수 없었다. “동행한 모든 사람이 모진(模眞)을 청했더니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모진의 법은 밝고 화창한 날 오전 7시에서 11시 사이에만 가능한데, 오늘은 해가 이미 기울었으니 내일 다시 오라 하였다.”》


사진에 찍히다 - 1863년 조선사절단, 베이징 러공사관서 첫 경험

다음 날인 1863년 1월 29일, 이항억을 필두로 16명이 갓 쓰고 도포 입은 모습으로 숙소인 사역회동관(四譯會同館)을 나서 근처의 아라사관으로 향했다. 그곳에 들어서자 일행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이항억이 먼저 의자에 앉았다. 무슨 기계가 한 대 놓여 있고 러시아 사람이 천을 뒤집어쓴 채 뭐라고 외쳤다. 역관들이 있었으나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고 찰칵, 기계음이 들렸다.

“기이하다! 이게 무슨 술법인가? 입으로 중얼거리는 말이 몸을 변화시키는 술법(환신지법·幻身之法)인 듯 하였다. 그 사람이 화상은 지금 가져갈 수 없고 며칠 후에 다시 와서 찾아가라고 하였다.”

조선시대 중국 사절단이었던 연행사. 18, 19세기 중국을 다녀오는 연행사의 긴 여정은 늘 새로운 문화를 만나는 과정이었다. 연행은 북학과 실학에 영향을 미쳤다. 박지원의 ‘열하일기’, 박제가의 ‘북학의’도 그렇게 탄생했다. 추사 김정희도 1809∼1810년 연행에서의 경험을 통해 자신의 학문적 예술적 성취를 이뤄낼 수 있었다.

그러나 1862∼1863년 연행사 일행의 경험은 이전보다 더 독특했다. 이들이 한양의 서대문 모화관을 출발한 것은 1862년 10월 21일. 두 달 동안의 여정 끝에 베이징에 도착한 이들은 아라사관에서 놀라운 경험을 했다. 러시아인에게 의뢰해 사진을 찍은 것이다. 한국인과 사진의 첫 만남. 1840년 사진이 등장한 지 23년 만의 일이다.
2개월 험난한 노정 - 한양서 3200리 길… 수양산 들러 백이숙제 참배도

백이숙제 고사의 배경인 중국 허베이 성 수양산 길. 지금은 채석장으로 변했다. 광석을 고르는 작업을 하던 인부들이 쉬고 있다. 사진 제공 최인진 사진역사연구소장
백이숙제 고사의 배경인 중국 허베이 성 수양산 길. 지금은 채석장으로 변했다. 광석을 고르는 작업을 하던 인부들이 쉬고 있다. 사진 제공 최인진 사진역사연구소장
이들은 모화관을 출발해 파주 개성 평양을 거쳐 의주 국경을 넘고 선양(瀋陽) 산하이관(山海關)을 거쳐 베이징으로 들어갔다. 긴긴 연행의 노정은 험난했다. 수년 전부터 이들 연행사의 길을 그대로 따라 그들의 촬영 여정을 추적해 오고 있는 최인진 사진역사연구소장은 “이항억이 이미 ‘천험(天險)의 지형’이라고 기록했던 것처럼 단둥(丹東)에서 칭스링(靑石嶺)을 지나 선양까지 가는 길이 가장 험했다”고 말했다.

이항억 일행은 산하이 관 바로 못 미쳐 팔리보(八里堡)에서 생일잔치를 하기도 했다. 산하이관을 넘어 백이숙제(伯夷叔齊) 유적이 있는 허베이(河北) 성의 수양산도 지났다. 절개를 지키기 위해 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고 살다가 굶어 죽었다는 백이와 숙제의 고사가 있는 곳이다.

최 소장은 “수양산은 조선 연행사들이 빼놓지 않고 참배했던 곳이었다. 그러나 백이숙제 사당의 흔적은 찾기 어렵고 채석장이 들어서 어수선하기만 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한양에서 의주까지 1186리, 의주에서 선양까지 574리, 선양에서 산하이 관까지 792리, 산하이관에서 베이징까지 670리. 그 멀고 험한 여정 끝에 연행사 일행은 사역회동관에 짐을 풀었다.

회동관이 있던 곳은 현재 베이징 중심부인 첸먼(前門) 둥다제(東大街) 23호. 톈안먼(天安門) 광장 동남쪽 끝과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회동관은 1903년 헐렸고 그 자리에 미국공사관이 들어섰다. 지금은 레스토랑과 식당 미술관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미국공사관 때의 옛 모습을 간직한 건물도 있고 최근 다시 들어선 유리벽 건물도 있다.

옛 모습의 건물은 프랑스 레스토랑으로 쓰이고 있었다. 이곳 후문은 과거 각국 대사관이 밀집해 있던 둥자오민항(東交民巷)과 붙어 있다. 둥자오민항 골목길을 따라 동쪽으로 2, 3분 걸어가면 중국 최고인민법원이 나온다. 아라사관, 러시아공사관이 있던 자리다. 고단한 연행 노정 끝에 1863년 이항억 일행이 사진을 촬영하고 한국 사진의 역사가 시작된 곳. 그러나 이를 알려주는 흔적은 없었고 육중한 건물과 높은 담장, 출입을 통제하는 경비병만 눈에 들어왔다.
자연스러운 포즈 - 한국 사진의 뿌리… 영국으로 흘러갔다 2008년 공개

1863년 2월 3일 이항억 일행은 다시 아라사관을 찾았다. 자신의 모습이 나온 사진을 보기 위해서였다.

“나의 화본(畵本)을 받아 보았더니 거기 내 모습이 비쳐 나왔다. 한낱 작은 조각에 지나지 않았지만 나의 진면목이 거의 완연히 박혀 있었다.”

현재 남아 있는 사진은 6장. 개인 사진도 있고 단체 사진도 있다. 관복을 입고 의자에 앉은 사람은 이항억으로 추정된다. 연행사 일행은 그해 4월 한양으로 돌아왔으나 이 사진은 가져오지 못했다. 러시아 사진가가 그대로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당시 베이징에서 의료 선교활동을 했던 한 영국인이 이를 수집해 영국으로 가져갔다. 그는 1892년 이 사진들을 런던선교회에 기증했고 현재 런던대 동양 및 아프리카 연구학교(SOAS)가 위탁 보관 중이다. 2008년 박주석 명지대 교수를 통해 사진 6점이 모두 공개됐다.

연행사 사진의 흥미로운 점은 모델의 포즈가 매우 자연스럽고 세련됐다는 사실이다. 요즘도 카메라 앞에만 서면 긴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150여 년 전 이국땅에서, 그것도 처음 만난 카메라 앞에서의 포즈로서는 놀라울 정도다. 그런 포즈를 이끌어낸 러시아 사진가의 촬영 기술이 탁월했던 것일까. 연행사 일행이 이미 사진이라는 존재를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에 대한 최 소장의 설명.

“베이징까지 가는 여정 도중 이들이 사진에 관한 정보나 지식을 접한 흔적이 있는지 모두 추적해 봤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찾지 못했습니다. 이항억 일행의 놀랄 만큼 자연스러운 포즈는 한국 사진사 연구에서 하나의 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한국 사진의 뿌리, 그 역사를 찾아가는 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베이징=이헌진 특파원 mungchi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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