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속의 근대 100景]<92>이봉창 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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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2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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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서 김구 만나
“日王제거” 먼저 제안
항일세력 집결 계기

상하이에서 일본으로 떠나기 나흘 전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양손에 수류탄을 든 채 태극기를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한 이봉창 의사. 동아일보 자료 사진
상하이에서 일본으로 떠나기 나흘 전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양손에 수류탄을 든 채 태극기를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한 이봉창 의사. 동아일보 자료 사진
《“범인 리봉창에 관한 취조는 동경 검사국에서 현행범으로 범행 직후에 구류하고 궁성검사청의 명령에 의하야 붕정(棚停) 차석검사와 구산(龜山) 선진(船津) 두 부장이 마타 취조하얏는데… 의외에 간단히 자백하고 사상범이 가지기 쉬운 오만한 태도는 업섯다고 한다.”

―동아일보 1932년 9월 21일자》
일제강점기 내내 강우규 김익상 김상옥 나석주 윤봉길 의사 등이 국내외에서 일으킨 항일의거는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폭압 통치에 대한 세계인의 여론을 환기시켰다. 이들 의거 중 가장 대담한 목표를 세웠던 의거는 무엇이었을까. 일제의 심장부이자 ‘1인 기관’인 일왕 히로히토를 제거하려 했던 이봉창 의사의 의거였다.

1932년 1월 8일 일본 도쿄 경시청 앞. 육군 관병식(觀兵式)에 참석한 뒤 돌아오는 일왕의 행렬을 보려는 사람들로 길은 혼잡했다. 두 번째 마차가 지나가려는 순간 폭음이 울렸다. 행렬은 그대로 질주했다. 무명옷을 입은 남자를 범인으로 체포하려는 일본 경찰에게 말쑥한 양복을 입은 남자가 다가갔다. “그 사람 아냐! 나야!” 그는 아무런 저항 없이 끌려갔다.

이봉창. 의거 당시 32세. 서울에서 기차 운전 견습생으로 일하다 25세 때 일본으로 건너갔다. 조선인이 당하는 고용차별 등 암울한 현실을 접하면서 노예로 전락한 민족의 아픔에 눈뜨게 된다. 1931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백범 김구를 만난다. 일왕을 제거하겠다는 대담한 계획을 먼저 제안한 것도 그였다.

12월 13일, 그는 김구가 이끄는 한인애국단 가입선서를 하고 양손에 수류탄을 든 채 태극기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나흘 뒤 일본으로 떠나면서 그는 눈물을 보이는 김구에게 “대사(大事)를 성취할 터인데 기쁘게 헤어집시다”라며 위로했다. 거사가 실패한 것은 행렬 맨 앞 마차에 탄 일왕을 두 번째 마차에 탄 것으로 잘못 생각한 데다 수류탄의 위력이 예상외로 약했기 때문이었다.

재판은 왕실 인사에 대한 범죄의 경우 단심(單審)으로 형을 확정한다는 일본 형법 규정에 따라 진행됐다. 이 의사는 9월 30일 사형선고가 내려지는 순간까지 내내 침착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대심원장 화인(和仁) 재판관은… 피고 리봉창을 사형에 처한다고 선언하얏다. 때는 오전 9시 15분. 피고는 각오한 듯이 별로 안색도 변치 안코 창백한 얼굴을 들어 고개를 끄덕이었다. 아츰부터 나리는 가을비는 무거운 법정의 공긔를 더욱 무겁게 하엿다.”(1932년 10월 1일 동아일보) 사형은 선고 열흘 뒤인 10월 10일 집행됐다.

이 의사의 의거는 국내외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해외 애국지사들이 속속 임시정부에 모여드는 계기가 되었고 이는 그해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훙커우공원 의거로 이어졌다. 중국 정부가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에 나선 것도 두 의사의 의거가 계기가 됐다.

광복 후 김구는 이봉창 의사의 유해를 돌려받아 1946년 효창공원에 윤봉길 백정기 의사와 함께 안장했다. 이 의사에게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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