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 이맛!]돼지등뼈 탑처럼 쌓으며…골즙 쪽쪽 빨아먹는 재미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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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0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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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탕


‘그대에게 줄 것이 없어/감자탕을 먹으며/뼈를 발라 살점하나 건넨다/그대는 손을 젓는다//내 살이라도 뜯어주고 싶은데/고작 돼지 등뼈에 붙은/살점이나 떼어주는 나를/그대는 막는다//나는 그대의 슬픔을 모른다/그대 안에 깃들지 못하고/저녁 구름처럼 떠나간 그대의 사랑을 모른다’ <강제윤의 ‘감자탕을 먹으며’에서>

감자탕의 주인공은 돼지등뼈다. 감자가 아니다. 원래 감자탕엔 감자가 없었다. 돼지등뼈에 시래기나 묵은지를 넣고 푹 삶은 뒤, 얼큰하게 매운 양념을 해서 먹던 것이다. 당연히 ‘돼지뼛국’이라고 했어야 옳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굳이 감자탕이라고 불렀다. 왜 그랬을까. 감자탕집 주인장들은 말한다.

“돼지등뼈 안쪽 뼈와 뼈 사이에 물렁뼈처럼 보이는 노란 힘줄 같은 것이 붙어있는데 이를 ‘감자’라고 했다. 사실 이것은 ‘척수’라는 신경세포의 일종인데 사람들은 이를 언젠가부터 척수라고 하지 않고 감자라고 불렀다. 감자탕도 바로 여기에서 유래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 돼지등뼈 이름 중에 공식적으로 ‘감자’라고 불리는 뼈는 없다. ‘감자뼈’는 사람들 사이에 입으로만 떠도는 이름일 뿐이다. 어떤 사람은 ‘돼지목뼈가 바로 감자 뼈’라고 목청을 높인다. 그럴 수 있다. 실체가 없으니 누가 뭐라 한들 반박할 근거가 없다. 어쨌든 정육점에 가서 ‘돼지 감자 뼈’를 달라고 하면 금방 알아듣고 내준다. 호적엔 없는 이름이지만 사람들끼리는 모두 통하는 이름인 것이다.

요즘 감자탕엔 감자가 듬뿍 들어있다. “감자탕에 왜 감자가 하나도 없느냐?”고 항의하는 손님이 많아진 탓이다. 일일이 ‘식물 감자가 아니라 돼지감자 뼈’를 이야기한다고 설명하기도 귀찮은 일이다. 이럴 땐 두말없이 감자알을 넣어버리면 해결된다. 다행히 감자가 기가 막히게 돼지등뼈와 궁합이 잘 맞았다. 손님들이 감자탕에 감자를 넣게 만든 것이다.

감자탕은 19세기말 전국에서 모여든 경인선 철도노동자나 한강철교공사 노동자들이 즐겨먹던 음식이다. 공사장 함바에서 탄생했다고 볼 수 있다. 커다란 무쇠 솥에 돼지등뼈와 시래기를 넣고 전라도식으로 요리해 내놓은 게 히트를 쳤다.

몸 쓰는 사람들 음식은 우선 배가 불러야 한다. 포만감이 와야 한다. 감자탕은 보기만 해도 든든하다. 그릇 가득 쌓인 삶은 돼지등뼈를 보면 허리띠가 느슨해진다. 감자탕 재료는 값이 싸다. 시래기나 묵은지, 돼지 등뼈는 쉽게 구할 수 있는 데 반해 영양가가 높다. 개장국 추어탕처럼 스태미나 음식이다. 술안주로도 제격이다. 가난한 노동자들에게 안성맞춤인 것이다.

감자탕식당은 대부분 시장통 허름한 골목에 있다. 무쇠 솥에서 하얀 김이 무럭무럭 나오는 집이 있다면 거의 틀림없다. 구수하고 매콤한 냄새가 발길을 잡는다. 서민음식이다. 중년 사내들이 돼지뼈다귀를 두 손으로 들고 후후 불며 뜯는다. 살코기가 잔디 벗겨지듯 스르르 떨어진다. 발라먹은 뼈다귀는 매끈하다. 중년 사내들의 벗겨진 이마 같다. 소주가 빠지면 허전하다.

아줌마들이 온돌바닥에 둘러앉아 감자탕을 먹는다. 빈 그릇에 발라먹은 뼈를 탑처럼 쌓아가며 뭐가 우스운지 깔깔댄다. 뼛속 골즙과 뼈에 묻은 국물을 입으로 쪽쪽 빨아대며 지나온 인생을 복기한다. 험하고 어두운 기억의 저편. 가끔 눈자위를 훔친다. 입가 붉은 국물자국이 안쓰럽다. 누구 삶인들 힘들지 않았을까. 젓가락으로 삶은 감자를 꿰어 아이들 손에 쥐어준다.

삶은 감자탕 뼈다귀는 비틀면 “뚜두둑!” 뼈 부러지는 소리가 난다. 젓가락으로 뼈 사이에 있는 고기를 빼 먹으려고 애쓸 것 없다. 비틀면 “우두둑!” 손가락마디 꺾는 소리가 나며 살점들이 우르르 떨어진다. 그 살점 맛이 으뜸이다. 아이들은 귀신같이 그 맛을 안다. 게다가 “우두둑!” 뼈 분지르는 소리가 아이들 호기심에 불을 지른다.

서울 응암동 대림시장에 가면 감자국거리가 있다. 감자탕 식당 10여 곳이 몰려 있다. 식당이름이 ‘××감자탕’이 아니라 하나같이 ‘××감자국’이다. 옛날엔 ‘탕’보다는 ‘국’이라 했다고 한다. 수십 년 역사를 자랑한다. 그만큼 맛이 식당마다 특색이 있다. 연한 살코기와 얼큰하고 구수한 국물 맛에 먼 곳에서도 찾는다. 감자탕을 다 먹으면 남은 국물에 김가루 참기름을 넣어 밥을 볶아준다.

감자탕은 돼지누린내나 느끼함이 없어야 한다. 그러려면 우선 돼지뼈를 1시간 정도 찬물에 담가 핏물을 뺀다. 그 다음엔 끓는 물에 뼈를 넣고 적당히 삶아 잡냄새를 없앤다. 삶은 뼈는 건져내 찬물에 씻은 뒤 채반에 담가 물기를 뺀다. 뼈를 본격적으로 끓일 땐 황기 대추 마 등 한약재를 넣는다. 향긋한 깻잎과 쑥갓도 넣어 냄새를 없앤다. 입맛에 따라 들깨가루나 떡 수제비 당면도 넣을 수도 있다. 간은 소금으로 맞춘다.

돼지뼈는 얼리지 않은 것이 좋다. 냉동뼈는 깊은 맛이 나지 않는다. 도축장에서 갓 나온 것이 맛도 최고다. 수입뼈보다 국산뼈가 구수하고 살이 부드럽다. 제주 흑돼지라면 두말 할 것 없다. 돼지등뼈엔 단백질 칼슘 비타민B1이 듬뿍 들어있다. 골다공증 예방에 좋다.

두 사내가 뜨거운 감자탕을 먹고 있다. 두 사람은 묵묵히 먹기에만 열중한다. 시선은 줄곧 돼지뼈에 멈춰있다. 가끔 소주잔을 기계적으로 비운다. 무슨 답답한 일이 있을까. 뚜둑! 뼈 분지르는 소리에 갈비뼈가 뜨끔하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황톳길. 삶은 정말 국물에 뜬 돼지비계 같은 것일까. 감자탕 뼈다귀에 붙은 살 한 점을 위해 파리와 다투어야 하는 것일까. 매콤하고 걸쭉한 국물이 목울대를 타고 넘어간다. 가슴이 먹먹해진다. 찬 소주를 단숨에 입에 털어 넣는다.

‘생각할수록 삶은 국물에 뜬/돼지고기 비계 같은 것,/버리기도 널름 먹기도 망설여지는/누군가 넣어주는 구정물 뒤엎고/사각의 울 뛰어넘을 그날을 언제인가/뜨끈뜨끈한 국물에 입천장 데며/파리와 함께 뼈다귀에 아슬아슬한/살점 다투며…’ <이재무의 ‘돼지감자탕’에서>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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