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외된 이웃을 위하여 20선]<17>지금 이대로도 괜찮아

  • 입력 2009년 1월 2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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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이대로도 괜찮아/사이토 미치오 지음/삼인

《“(베델의 집은) 절망하는 것이 원조를 받고, 병이라는 것이 긍정되며, 그대로도 괜찮다는 생활방식, 또는 그대로 있을 수밖에 없다는 생활방식이 제창된다. 그 생활방식은 너무나 많은 문제를 안고 있음에도 그 밖의 다른 어떤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의 좋은 표정, 깊은 안도감, 생각지도 못한 풍요로움을 낳고 있다. ‘베델의 집’ 사람들은 그런 생활방식이 지금 당장 이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앞으로 200, 300년 후의 세계에서는 반드시 좋은 평가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가만히 그 망상을 키우고 있다.”》

정신장애인 공동체의 주체적 삶

이 책은 일본 TBS 텔레비전 기자로 오랫동안 정신장애 문제를 취재해온 저자가 ‘베델의 집’이란 정신장애인 공동체를 소개한 르포다. 이후 베델의 집에 소속된 이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풀어놓은 책 ‘베델의 집 사람들’(궁리)이 지난해 국내에도 소개됐지만, 그 이름을 널리 알린 건 이 책의 공이었다.

베델의 집이란 일본 홋카이도 우라카와라는 작은 바닷가 동네에 있는 1만5000여 명의 공동 주거구역. 1979년 이 지역 적십자종합병원에서 일하던 무카이야치라는 사회복지사가 낡은 교회 건물을 구입했다. 피해망상증이나 환각, 환청을 동반하는 ‘통합실조증’(일본은 2002년부터 ‘정신분열증’ 대신 이 정신병명을 쓴다)에 시달리는 이들이 이곳에 모여들며 공동생활이 시작됐다.

정신장애인 공동체 베델의 집이 표방하는 것은 ‘장애인 스스로 주인공이 되자’다. 베델의 집 사람들은 관리되거나 지배받지 않으며 이 사회에 신세지지 않고, 스스로 돈도 벌고 사회와 이웃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는다는 신념으로 생활한다.

처음엔 어려움도 많았다. 마을에서 나가달라는 원성도 들었다. 경찰 순찰차와 구급차가 쉴 새 없이 들락거렸다. 많은 의사도 “무모하고, 상식과 동떨어진 행위”라고 비난했다. 복지와 행정의 틀 안에서 치료받고 통제받아야 할 ‘정신장애인’이 모든 것을 자기 의사대로 결정한다는 건 쉽게 이해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 무모한 도전은 놀랍게도 성공한다. 심지어 이들은 스스로 공동 주거와 작업장을 짓고 ‘유한회사 복지숍 베델’이란 회사도 만들어 지역 특산품 다시마를 비롯해 다양한 상품을 만들어 팔며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평범한 일반인들도 하기 힘든 공동생활과 자급자족을 장애인들이 이뤄낸 것이다.

이들의 성공은 보통 사람들이 장애인을 대할 때 그들의 ‘장애성’에만 집중해 얼마나 고정관념을 갖고 바라보았는가를 보여주는 반증이다. 저자는 “정신장애인은 병이나 인간관계 등으로 엄청난 고생을 하면서도, 보호나 보살핌의 이름 아래 병원에 갇혀서, 고생에 직면하는 자유, ‘고민하는 힘’을 계속 빼앗겨 왔다”고 일갈한다. 베델의 집은 고민하는 힘을 가지고 더불어 살면, 장애인조차도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문제와 대면해 부딪치며 스스로 해결해 나간다는 걸 보여준다.

베델의 집에는 독특한 캐치프레이즈가 많다. ‘올라가려는 삶을 버리고 아래로 내려가는 삶을 지향하자’ ‘이익이 없는 상황을 소중하게 생각하자’ ‘되도록 자신의 병을 자랑하자’ ‘안심하고 땡땡이칠 수 있는 회사를 만들자’ 등. 억지로 뭔가를 만들어내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인 이들은 새로운 세상을 창조해냈다. 진정한 장애는 신체적 불편함이나 병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편협한 마음과 사고 자체에 있는 것이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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