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과 소설가가 추천하는 가을 시선 20]<9>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 입력 2007년 10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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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자신이 살아온 만큼 사라져 간다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봄이면 제 영혼을 조금씩조금씩 털다가 사라져 버리는 나비처럼.―‘우주로 날아가는 방2’ 중에서》

어머니도 꽃무늬 팬티를 입는다

우리는 오랜 시간 시를 결핍의 시간으로 읽어 왔다. 시인이 가진 트라우마에 동조하며 때론 동정하며 다른 종족의 언어, 다른 우주의 몸짓, 신비한 언어의 비늘로 둘러싸인 물고기의 비밀을 읽는 것이었다. 시인과 소통한다는 것은 우주와 나만의 길을 여는 것이었음을 새삼 다시 깨닫는다. 여전히 시인들은 진화하고 새로운 세계와 미래에 대한 융통성을 갖게 해 준다.

그러나 새로운 시인의 탄생이 꼭 은하계 밖 동떨어진 우주의 탄생과 같은 것은 아니다. 언제나 시인의 더듬이는 현존하는 세계 안의 다른 세계를 향하고 있고, 그 안에서 작은 우주, 또는 더 큰 우주를 생성해 내곤 한다. 새로운 시인을 대면할 때마다 어디서 본 듯하고 너무나 생소하게 느껴지는 이중적인 감성의 흐름은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여기 생소하기도 하고 언젠가 본 듯도 한 시인 김경주가 있다.

‘나 없는 빈방에서 나오는 그 시간이 지금 내 영혼이다 나는 지금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충혈된 빗방울이 창문에 눈알처럼 매달려 빈방을 바라본다’(‘부재중’ 중에서). 그의 언어는 ‘이 세상엔 없는 계절’임에도 불구하고 오롯이 존재하는 또 하나의 계절이다. 새로운 세계, 소우주를 어디에 펼칠 것인가 하는 것도 시인의 몫, 우리만 모를 뿐이다. 그가 제약하는 공간과 시간도 이 세상엔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분명 현존한다. 시인은 그 경계에서 줄을 탄다.

시의 세계가 언제는 그렇지 않았던가. 있는 듯 없는 듯. 시인은 보이지 않는 것과 보임, 존재와 부재를 뒤섞어 ‘환영’의 공간을 창출해 낸다. 시간도 마찬가지 아니던가. 공간 없는 곳에 시간이 없듯 시인의 시에서 흘러가는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시인의 초침은 시계 위에 있지 않고 ‘언젠가 나도 저런 모습으로 내가 살던 시간 앞에 와서 꿈처럼 서성거리는’ 창문 앞에 놓여 있다. 공간 아닌 공간, 시간 아닌 시간의 시는 독자를 우주로 인도하는 듯하다. 서사의 범주에 있는 나로서는 그것이 기이하고 신비로울 따름이다.

김경주의 시를 어려워하거나 생소해하는 이도 있다. 그 생소함은 시인이 창출해 낸 시공간에 있지 않을 것이다. 김경주는 시인의 눈으로 봐야 하는 것을 ‘봉인된 선험’에서 찾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새롭게 느껴지는 것은 아닐는지. 김경주는 그것마저 우주의 한 딜레마로 여길 뿐 비애스럽지 않다. ‘문득 어머니의 없었던 연애 같은 것이 서러워지기 시작’하는 것은 오래도록 숨겨진 여성성, ‘웬만해선 시들지’ 않을 어머니의 재탄생에 가깝다. ‘밤이 되자 몰래 달력의 흰 뒷면에 눈이 큰 미미들을 그려 넣’는 누이들에게 김경주라고 왜 그 비애스러움이 없겠는가. 다만 비애스러움을 말하는 새로운 방식일 뿐. 이렇게 심오한 ‘어머니는 아직도 꽃무늬 팬티를 입는다’는 소우주적 사실을 신문 알림이나 기사 같은 형식으로서 발설하는 위트는 분명 시가 주는 새로운 재미다. 시에 재미를 느끼지 못했던 자, 김경주의 시를 읽어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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