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권장도서 100권]<92>설국-가와바타 아스나리

  • 입력 2005년 7월 20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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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는 전형적인 ‘일본 회귀’형 작가에 속한다. 일본 회귀란 처음에는 서양문학의 영향 아래 작품 활동을 하다가 나중에 일본 전통에 기초하는 작풍으로 전환하는 것을 말한다. ‘모더니즘 문학의 기수’ 가와바타는 ‘설국’을 계기로 전통 미학의 세계로 들어서게 된다.

이 소설은 무려 13년간의 개고를 통해 완결판이 나왔다. 마치 분재를 다듬는 정성으로 조탁한 일본어 표현은 당대 최고의 예술적 성취라는 평가를 받았다. 물려받은 재산으로 무위도식하며 여행지에서 매력적인 두 명의 여성과 조우하는 시마무라는 무릇 남성의 꿈과 환상을 대신 구현하는 존재다. 산행 길에 우연히 찾아든 온천 마을에서 게이샤(藝者) 고마코를 만난 시마무라는 그녀의 청결한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세 차례 방문하게 된다. 고마코도 시마무라에 대한 순수한 애정을 키워간다. 그러나 자신에 대한 고마코의 사랑이 현실적인 크기로 다가왔을 때 시마무라는 온천 마을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결국 시마무라가 추구한 것은 현실적인 사랑이 아닌 도회의 권태로운 일상을 벗어나게 해 주는 감미로운 환상이었다.

이 소설은 중편 이상의 분량을 지녔지만 이렇다 할 만한 줄거리도 없다. 주제는 모호하고 인물의 성격도 뚜렷하지 않다. 주고받는 예사로운 대화를 통해 등장인물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은 수묵화의 여백을 감상하는 것 이상의 내공을 요한다. 이 정도면 “몇 번을 읽어봐도 잘 모르겠다”는 ‘용감한’ 고백이 일본인 독자 사이에서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아름다운 일본의 나’라는 가와바타의 노벨 문학상 수상연설 제목을 비아냥거리듯, 26년 후 같은 자리에서 ‘모호한 일본의 나’라는 제목의 수상연설을 한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도 분명 그러한 독자 중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두 사람의 연설 제목에 나오는 ‘아름답다’와 ‘모호하다’는 두 개의 형용사야말로 이 소설의 특징을 적확하게 짚어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결여된 점이 적지 않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오랫동안 읽히는 이유는 작가의 섬세한 미의식과 감각적인 문체 때문일 것이다. 전편에 걸쳐 펼쳐지는 자연의 정경 묘사는 거의 시의 영역에 미쳐 있다. 소설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밤하늘의 은하수에 대한 묘사는 그 정점을 보여준다. 등장인물 역시 자연의 한 부분이다. 작품 속에 그려지는 고마코와 요코는 자연과의 합일 속에서 신비로운 아름다움과 생명력을 부여받는다. 이 점에서 ‘설국’은 동양적 정신세계의 요체를 현대적으로 구현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게이샤, 온천, 후지산 등의 대상은 한두 세기 전부터 서양에서 일본에 대한 환영(幻影)을 만들어 내는 데 쓰인 대표적인 재료이다. 설국이 눈으로 인해 외부로부터 고립된 세계라면, 소설 ‘설국’은 고유의 풍토와 전통 그리고 번역을 완강히 거부하는 일본어 문체로 세계문학으로부터 차단되어 있다. 이 때문에 ‘설국’이 노벨 문학상을 받게 된 것은 비서구 세계를 ‘신비’의 영역에 가둬두고자 하는 오리엔탈리즘의 산물이라는 시각이 존재한다. 결과적으로 ‘설국’은 이른바 ‘일본적 미학’에 대한 신화를 추인(追認)하고, 나아가 그것을 범세계적으로 증폭시키는 상징적인 작품이 되었다.

윤상인 한양대 교수 일본언어문화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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