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재 기자의 무비홀릭]‘곡성’ 사용설명서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5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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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영화 ‘곡성’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 ‘곡성’의 주인공 종구(곽도원)가 악령에 들린 딸을 끌어안고 울고 있다.
영화 ‘곡성’의 주인공 종구(곽도원)가 악령에 들린 딸을 끌어안고 울고 있다.
이승재 기자
이승재 기자
11일 개봉해 흥행 1위를 달리는 나홍진 감독의 영화 ‘곡성’처럼 사람들의 반응이 극명하게 갈리는 경우도 드물다. “악취미로 가득한 미친 영화”란 악평부터 “한국 오컬트(심령) 영화의 기념비적 작품”이란 찬사까지. 공통적인 반응 하나는 “뭔가 심오한 듯한데, 몹시 모호하다”는 것이다.

시골 마을에 낯선 일본인(구니무라 준)이 나타난 뒤 가족 살해의 엽기적 사건이 줄을 잇는다. 경찰은 야생버섯을 잘못 먹어 벌어진 일이라는 결론을 내리지만, 마을에는 “일본인 때문이다. 그는 악마다”라는 소문이 퍼진다. 경찰 종구(곽도원)는 자신의 딸마저 악령에 사로잡힌 듯 보이자 무속인 일광(황정민)을 불러들이는 한편 낯선 일본인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어떤가. 줄거리만 보아선 장르적으로 딱 떨어지는 반전과 결말을 갖춘 미스터리 구조인 것만 같다. 하지만 인간의 합리적 사고와 기대가 오히려 이 영화의 이야기를 미궁에 빠뜨려 버리는 ‘역살’(영화 속 황정민의 표현)이 되어 돌아온다. ‘읽으려’ 하지 말라. ‘받아들이려’ 하라. 비로소 그때 이 영화는 속살을 드러낸다.

자, 그럼 지금부터 단 한 개의 질문과 답변을 통해 상업 영화의 굉장한 성취인 ‘곡성’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드린다.

Q. 미칠 듯이 궁금합니다. 황정민이 결국 악마였던 건가요? 흰옷 입은 여인 무명(천우희)은 수호신이었던 건가요? 일본인은 악마인가요?

A. 악마 아니면 천사, 이렇게 일도양단하여 정답을 고르려는 자체가 잘못된 출발점입니다. 왜 꼭 답이 있고, 그것도 꼭 하나라고 생각하나요?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라는 바보 같은 질문을 받으면 왜 엄마 혹은 아빠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히나요. “둘 다 싫어” 또는 “그 질문을 하는 엄마는 내가 좋아, 동생이 좋아?”란 답변이 될 수 없나요.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지는 생각의 과정을 통해 답을 찾으려는 것이 문제입니다.

‘곡성’의 이야기는 마치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치밀하게 직조된 모양새를 띠고 있지만, 사실 각각의 에피소드는 파편처럼 존재할 뿐입니다. 그래서 논리적 인과관계를 찾아내려 하면 할수록 난해해질 수밖에 없지요. 자, 이럴 땐 이런 생각을 해볼까요. 우리가 컴퓨터 모니터에 여러 개의 창을 띄워놓고 동시에 작업을 하는 경우를 말이지요.

지금 나는 회사에 제출할 매출분석 자료를 작성하는 동시에 ‘야동’을 보고 있습니다. 또한 모니터 오른쪽 귀퉁이엔 메신저를 띄워놓은 채 오늘 학교에서 토하고 조퇴한 중학생 딸을 걱정하는 내용을 아내와 주고받고 있지요. 자, 매출 자료와 야동과 메신저, 이 셋을 한 줄로 세우면 논리적으로 이어지지 않지요? 인과관계도 성립하지 않고요. 하지만 각각은 모두 ‘21세기형 융합인재’인 나의 진면목들입니다. 삶이 본디 불완전하고 부조리한데, 어찌 논리적으로 정리되고 재단될 수 있단 말인가요.

‘곡성’도 마찬가지입니다. 황정민, 천우희, 일본인 등은 마치 모니터 속 여러 창처럼 각기 존재할 뿐입니다. 황정민과 천우희의 관계, 천우희와 일본인의 관계, 황정민과 일본인의 관계는 마치 얽히고설켜 있는 듯 편집돼 있지만, 알고 보면 이런저런 미혹된 말들을 쏟아내며 주인공(곽도원)의 마음을 시험해보는 장난꾼들에 불과합니다. 이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논리적으로 가리려 들지 말고, 이들이 쏟아내는 말들에 주목해보세요. 놀랍게도 “너는 내가 뭐라고 생각하는데?” “그놈 말 믿지 말아” “그놈 사람 아니야. 귀신이야” “귀신인 줄 알았는데 귀신이 아니야”처럼 질문하거나, 의심하거나, 부정하는 종류의 대사들을 한결같이 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결국 이들은 단 하나의 인물일 수도 있고, 어쩌면 모두 독버섯에 중독된 마을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환각일 수도 있습니다.

캐릭터들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곡성’의 메시지는 명확합니다. “직접 본 것이 아니면 의심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이것만 염두에 두면, 모든 장면이 갑작스레 이해됩니다. 이런 간단하고도 심오한 메시지가 함축된 대사가 바로 정체불명 일본인의 다음과 같은 마지막 대사입니다. “나는…, 나다.” 그렇습니다. 악마로 보면 악마이고, 천사로 보면 천사입니다. 아니, 악마도 천사도 아닙니다. 그는 그일 뿐입니다. 산을 산으로 보지 못하고, 물을 물로 보지 못한 채 지독하게 의심하고 의심하다 영혼을 갉아먹으며 죽어가는 것이 인간의 존재인 것입니다.

아, 그럼 이렇게 있어 보이는 해석을 용감하게 해대는 저는 ‘곡성’을 200% 이해했을까요? 의심하지 마세요. 믿으세요. 불신이 바로 지옥이고 악마입니다.

이승재기자 sjda@donga.com
#곡성#한국 오컬트 영화#심령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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