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5년사 쟁점 재조명]<1부>⑥臨政을 어떻게 볼 것인가

  • 입력 2004년 9월 19일 18시 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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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후 처음 맞은 해인 1920년 1월 1일 임정 요인 58명이 중국 상하이에서 대형 태극기를 배경으로 신년축하회 기념촬영을 했다. 두 번째 줄 맨 왼쪽 의자에 앉아 있는 이가 당시 내무부 경무국장이던 백범 김구 선생이다. 그리고 그 줄 왼쪽에서 아홉번째부터 이동녕 이동휘 이시영 안창호 선생의 모습이 보인다.-동아일보 자료사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후 처음 맞은 해인 1920년 1월 1일 임정 요인 58명이 중국 상하이에서 대형 태극기를 배경으로 신년축하회 기념촬영을 했다. 두 번째 줄 맨 왼쪽 의자에 앉아 있는 이가 당시 내무부 경무국장이던 백범 김구 선생이다. 그리고 그 줄 왼쪽에서 아홉번째부터 이동녕 이동휘 이시영 안창호 선생의 모습이 보인다.-동아일보 자료사진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임정)의 법통(法統)을 계승한다고 우리 헌법 전문 첫머리에 명기돼 있다. 따라서 요즘 여권 일각에서 건국의 정통성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나 그에 대한 반론 모두 그 뿌리는 임정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닿아있다. 이는 광복 3년사의 최대 논쟁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다. 민족진영은 ‘해방정국을 이끌어갈 사실상의 정부’로 임정을 인정하고 떠받들어야 한다는 이른바 임정봉대(臨政奉戴)론을 내세웠다. 반면 좌익진영은 장제스(蔣介石) 정부의 지원으로 겨우 유지된 ‘일부 망명객들의 집결처’라고 임정을 깎아내렸다.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 공산주의자들도 남한의 좌익진영과 똑같은 논리를 폈다. 돌이켜보면 임정의 정치적 실체를 무시한 채 자기들이 주도하는 정권을 세우려던 좌익진영과 공산주의자들의 반(反)임정론은 연합국이 만들어놓은 분단을 굳히는 데 일정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 3·1운동 준비하면서 망명정부 구상

임정은 1919년 거족적 독립만세운동인 3·1운동의 산물이었다. 국내의 독립운동가들은 3·1운동을 계획하면서 해외 망명정부 수립까지 예견하고, 현순 목사를 중국 상하이로 보내 그곳에서 활동하던 민족지도자들과 함께 임정을 세우게 했다. 일제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租界)에서 임정 수립이 선포된 것은 4월 13일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서울에서도 비밀리에 ‘한성(漢城) 임시정부’의 수립이 선포됐다. 망명 한인들이 많이 살던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도 ‘노령(露領) 임시정부’의 수립이 선포됐다. 상하이임정은 곧 한성임정과 노령임정을 통합해 그 기반을 강화했다. 이 임정의 초대 임시대통령이 이승만이었다. 안창호 김구 이동녕 김규식 조소앙 이시영 신익희 이동휘 등 쟁쟁한 민족지도자들도 여기에 참여했다.

이렇게 화려하게 출범한 임정이었지만 이탈자들이 나타나면서 1925년 이후엔 그 위신과 영향력이 크게 약화됐다. 한때는 찾아오는 사람도, 보내오는 헌금도 거의 없어 임정 청사의 임대료나 중국인 경비원 봉급조차 지불하지 못할 정도로 영락했다.

○ 일본과 독일에 선전을 포고한 임정

1932년 이봉창 의사와 윤봉길 의사가 각각 일본 도쿄와 상하이에서 일으킨 의거는 임정의 위상을 크게 바꿔놓았다. 임정 주석인 김구가 지휘한 이 의거들은 임정이 무력한 망명객들의 피신처가 아니라 ‘중국인 100만명도 해내기 어려운 일을 해낸’ 내실 있는 행동조직임을 과시했다. 그 결과 중국 정부는 임정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으며, 그것은 광복군 발족을 지원하는 데까지 확대됐다.

이에 고무된 임정은 좌우합작을 실현시켜 더욱 기반을 넓혀나갔다. 즉 김구의 지도력 아래 1940년 이후 단계적으로 김성숙과 장건상 같은 좌파인사들도 입각시켜 민족통일전선을 형성했다. 그리고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과 독일을 상대로 선전을 포고하기에 이르렀다. 그 무렵 임정의 주미외교대표부 전권대표인 이승만은 미국에서 코리아의 독립을 호소하는 외교선전에 주력했다.

임정의 활약상은 우선 연합국에 영향을 주었다. 연합국은 1943년 카이로회담에서 ‘밟아야 할 절차를 모두 밟아서’라는 조건을 달기는 했으나 “일제가 패망한 이후 코리아는 자유와 독립을 얻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연합국은 1945년 포츠담회담에서도 카이로선언을 재확인했다. 이것은 확실히 임정의 공로였다. 임정은 한걸음 더 나아가 독립의 조건을 철회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기도 했다.

○ 중국이 미국에 임정 승인을 제의했으나

당당한 임정의 존재는 일본군에 징집된 한인 청년들을 감동시켰다. 김준엽(전 고려대 총장)과 장준하(월간 ‘사상계’ 창간)를 비롯한 한인 청년들은 일본군을 탈출해 당시 중국 정부를 따라 충칭으로 옮긴 임정에 합류했다. 미국 육군의 전략정보처(OSS)는 그들을 주목해서 ‘독수리계획’이나 ‘냅코(NAPKO)계획’과 같은 특수유격훈련 계획을 마련하고 이 훈련을 마친 한인 청년들을 중심으로 한반도에 진공하는 작전을 세웠다.

독수리계획은 중국에 있는 광복군을 한반도에 침투시키는 것이고, 냅코계획은 미국 하와이의 한인을 한반도와 일본에 침투시키는 것이었다. OSS는 이들 계획을 집행하기 위해 광복군 안에 한미합동지휘부를 세웠다. 대체로 1945년 4, 5월께 실천단계에 들어간 이들 계획에는 김우전(현 광복회 회장)과 유일한(유한양행 창업자) 등도 참여했다.

마침내 중국 정부가 임정을 한민족의 망명정부로 승인해 줄 것을 미국 정부에 제의했지만 미국측은 응하지 않았다. 전후 소련과 협력해 코리아에 대한 국제적 신탁통치를 구상하던 미국으로서는 소련의 반대를 무릅쓰면서까지 임정을 승인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광복군과 함께 한미합동지휘부를 설치하고 한반도 진공계획을 세운 사실은 미국도 임정의 실체를 인정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 광복군이 仁村과 民世에게 보낸 쪽지

일제가 패망하자 독수리계획에 참여했던 이범석 김준엽 장준하 등 광복군은 미군과 함께 군용기로 1945년 8월 18일 여의도비행장에 도착했으나 일본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이튿날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범석은 뒷날 회고록에서 그날의 긴박했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떠올렸다.

“우리를 감시하는 일본헌병 중에 한국 사람을 발견하게 됐다. 그래서 국내에서 지도자 역할을 할 수 있는 인촌(仁村) 김성수씨와 민세(民世) 안재홍씨에게 연락의 쪽지를 부탁하고 여의도비행장을 떠났다.”

김준엽의 회고록에도 같은 취지의 내용이 나온다. 이에 대해 국사편찬위원회의 김광재 편사연구사는 최근 논문에서 “임정은 김성수 송진우 등 국내의 우파세력과도 연계를 모색했다”며 “일제의 패망이 1946년 말로 예상되던 당시 상황에서는 충분히 가능성 있는 계획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또 “작전이 더 지속되었더라면 한국의 독립운동 진영은 국내외적으로 보다 밀접하게 연계한 상태에서 광복을 맞이하였을 가능성이 컸다”고 썼다(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군사(軍史)’ 제52호 2004년 8월, 21∼22쪽).

○ 임정의 還國을 기다리는 민족진영

이러한 배경에서 송진우로 대표되는 국내의 민족진영은 일제가 패망하기 직전 조선총독부로부터 치안권을 비롯해 통치권의 상당 부분을 넘기겠다는 제의를 받았으나 이를 단호히 뿌리치면서 “임정의 환국(還國)을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임정은 좌익진영이나 공산주의자들이 폄훼한 것처럼 ‘일부 우익 망명가들의 집결처’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해방정국에서 민족의 구심점이 되기에 충분했으며, 거기에 임정봉대론의 정당성이 있었다.

그런데도 좌익진영이 임정을 헐뜯고 연합국마저 임정을 승인하지 않아 남북 분단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미 군정(軍政)과 국무부는 일제 패망 후 약 3개월이 지난 1945년 11월에 가서야 비로소 임정을 중심으로 ‘정부위원회’를 구성할 계획을 세우지만, 그것은 기회를 놓친 구상으로 끝나고 만다.

특별취재팀 전화 : 02-2020-0235, e메일 : 81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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