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역사와의 대화]<10>화회문기

  • 입력 2004년 7월 5일 18시 4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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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청백리(淸白吏)라면 부정·비리와 담을 쌓았을 뿐만 아니라 빈곤한 생활로 일관한 관료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국가로부터 녹봉을 받고 재산을 상속받은 그들에게 가난한 생활을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사림의 존경을 받았던 퇴계 이황(退溪 李滉) 가문의 분재기(分財記·재산 분배 기록)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이 문서는 이황의 손녀 사위였던 운천 김용(雲川 金涌)의 종손가에서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한 자료로 이황의 손자 손녀 5명이 합의해 재산을 분배한 기록인 ‘화회문기(和會文記)’다. 초안은 1586년에 만들어졌지만 전란 등의 사정으로 미뤄지다가 1611년에야 완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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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내용을 보면 우선 제사를 위해 맏아들에게 일정 부분의 노비와 전답을 별도로 지급했다. 다만, 아버지 준(寯·이황의 아들)은 “너희 조부의 신주를 모셔두는 사우(祠宇)는 백세(百世)동안 옮기지 못하고 묘제(墓祭) 역시 폐지해서는 안 된다”는 유언을 남겼다.

또한 조선 전기 자녀균분 상속의 관행에서 벗어나 장자 위주의 상속으로 변모해 가는 추세도 나타난다. 예컨대 노비의 경우 장자인 이안도(李安道)에게 제사를 위한 10명을 포함해 94명을 지급한데 비해 박려(朴%)의 처인 장녀에게는 72명, 차남 이순도(李純道)에게 60명, 김용(金涌)의 처인 차녀에게 63명, 막내 이영도(李詠道)에게 64명을 각각 배당했다.

그러면 분배된 노비 353명 가운데 이황에게서 직접 상속받은 노비는 몇 명일까.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지만 둘째 채(寀)는 일찍 사망했기 때문에 재산은 준에게 상속됐다. 따라서 이들 노비 중 준의 처가 소유했던 33명과 이황이 사망한(1570년) 이후에 태어난 16세 이하 160명을 뺀 나머지 160명이 그가 소유했던 노비로 추산된다. 여기에 그의 거주지인 예안(禮安)을 비롯해 안동·영주·봉화·의령 등지에 산재한 전답을 합치면 그의 재산규모가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황이 관직에서 은퇴한 뒤 도산서원에서 상당수의 제자를 길러 낼 수 있었던 경제적 토대는 여기서 마련된 셈이다. 이는 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조선시대 유수한 사림의 보편적 경향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항산(恒産)이 없으면 항심(恒心)을 갖기 힘든 법이기 때문이다.

설석규 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원·한국사


퇴계 이황의 손자 손녀들이 합의하여 재산을 분배한 기록인 ‘화회문기’. 이황이 관직에서 물러난 뒤 도산서원에서 많은 제자들을 길러 낼 수 있을 만한 경제적 토대를 가지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사진제공 한국국학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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