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성두의 도시와 예술가]<4>케라메이코스와 케라모스

  • 입력 2002년 12월 9일 17시 56분


아테네 케라메이코스 전경. 무덤 터와 가마 터가 섞여서 발굴되었다. 기원전 478년 테미스토클레스가 축조했던 성벽과 쌍둥이 성문 디필론도 남아 있다./사진제공 노성두씨
아테네 케라메이코스 전경. 무덤 터와 가마 터가 섞여서 발굴되었다. 기원전 478년 테미스토클레스가 축조했던 성벽과 쌍둥이 성문 디필론도 남아 있다./사진제공 노성두씨
《“저승에 가서 임금노릇 하느니, 가난뱅이 삯꾼이라도 이승이 더 낫다.”

아킬레우스가 했던 말이다. 형용무쌍한 트로이전쟁의 영웅도 죽는 것은 꽤나 무서웠나 보다. 그러나 신이 아닌 다음에야 필멸의 인간이 언제고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바로 죽음이다. 바람둥이 그리스신들이 인간하고 퍽 비슷하다고들 하지만, 딱 하나 불멸의 존재라는 사실만큼은 다르다. 그래서 그런지 그리스인들은 죽음을 신성하게 여겼다. 무덤도 성스러운 곳으로 간주했다. “죽음이 죽을 염려는 없으니까”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1873년 아테네 인근에서 죽음의 도시가 발굴되었다. 수레에 모래를 한 짐 싣고 가던 인부가 우연찮게 돌부리에 걸리는 바람에 바퀴를 내려다보니 닳아빠진 대리석 귀퉁이가 튀어나와 있었던 것이다. 이 일을 전해들은 그리스 고고학자 루소풀로스는 당장 삽을 들고 파 들어가기 시작했다.

프록세노스의 딸 헤게소의 묘비부조 (기원전5세기말 제작. 높이1.49m). 원작은 아테네 국립고고학박물관에 있다. 그리스인들은 여자가 죽으면 하데스의 신부가 된다고 믿었다. 보석상자를 열고 들여다보는 모습./사진제공 노성두씨

민주 정체의 요람이라는 아테네 아고라에서 철학자 플라톤이 아카데미 모임을 가지곤 했다는 헤로스 아카데모스의 숲으로 이어지는 성스러운 길 중간쯤이었다. 그런데 파면 팔수록 대리석들이 끝도 없이 꼬리를 물고 나왔다. 인근의 흙더미를 8m 깊이까지 걷어내자 수천 년 동안 잠들어 있던 거대한 도시가 기지개를 펴며 깨어났다. 고대 문헌에 기록으로만 남아 있던 케라메이코스, 곧 죽음의 도시였다.

무덤 터에는 죽은 자의 생전 모습을 돋을새김한 묘비조각과 제물의 피를 흘려보내던 좁은 수로, 제사를 지내던 흔적 따위가 삼밭처럼 얽혀 있었고, 묘지마다 생전에 썼음직한 생활도기 따위가 십수점씩 부장되어 있었다. 고추장독 크기의 옹관 속에 어린아이 유골이 사지가 접혀서 들어 있는 경우도 여럿 나왔다.

기원전 2000년경부터 무덤 터로 사용되었던 케라메이코스 지역의 발굴은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면서 곧 발굴고고학의 한 갈래로 정리된다. 유골의 골반뼈와 부장품을 살펴보면 성별, 나이, 가문, 사회적 지위뿐 아니라 그 당시의 장례와 매장 관습까지 읽어낼 수 있었다. 가령 아티카 지역에서는 거울, 소꿉, 물긷는 항아리나 신부 화장용 물 항아리가 나오면 여자무덤이고 술잔, 운동선수가 쓰는 때밀이 쇳대가 들어 있으면 남자 무덤이 틀림없다. 무엇보다 흙 속에 묻혀 있던 부장 도기의 보존 상태가 거짓말처럼 말짱한 것도 행운이었다.

케라메이코스는 아테네시 외곽을 두른 성벽의 북서쪽 쌍둥이 성문 바깥 동네였다. 지천에 무덤이 흩어져 있고, 화장하느라 시커먼 장작더미가 널려 있어서 사뭇 을씨년스러웠겠지만 그렇다고 얌전한 동네는 아니었다. 로마시대 풍자시인 루키아노스가 쓴 ‘창녀들의 수다’에 보면 이곳 케라메이코스에서는 골목마다 분가루 짙게 바른 창녀들이 둥지를 틀고 어수룩한 오빠들 팔목을 잡아끄는가 하면, 담 그늘마다 돈놀이 아줌마와 포도주 장수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뜨내기손님들을 호객하느라 북적댔다고 한다.

에리다노스 개천을 낀 습지라서 주거지로는 부적합했지만 물과 땔감이 풍부해서 언제부턴가 생활용기와 부장용 그릇을 굽는 도공과 도기 화가들이 공방을 차리기 시작했다. 파우사니아스의 ‘여행기’를 보면 케라메이코스라는 도시 이름도 도공 케라모스가 이곳에 처음 자리를 잡은 데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이곳에 모인 도공들이 구워 파는 도기는 그야말로 생활필수품이었다. 딱히 식품을 보관할 용기가 마땅치 않았던 때라서 곡물뿐 아니라 식수나 올리브기름, 꿀, 식초 같은 것을 채워도 새지 않는 도기는 수납, 저장, 운반에 꼭 안성맞춤이었다. 시장에서 올리브기름을 한 통 사더라도 단지째 사고 팔아야 했으니까.

케라메이코스는 무덤터 사이사이에서 가마터만 15기나 확인되었다. 이 정도 규모라면 이곳의 생산물량만 가지고도 아티카 전역의 도기 수급에다 멀리 남부 이탈리아와 아드리아해 도서지역의 식민시까지 수출하고도 너끈하다. 말하자면 효자산업이었던 셈이다. 실제로 이탈리아에서는 바다 건너 그리스에서 수입한 호화 장식도기들을 귀족들의 무덤에 부장하는 관습이 생겨나기도 했다. 케라메이코스 발굴은 수레바퀴에 걸린 돌부리 하나 덕분에 두 가지 역사를 새로 쓰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스 도기의 역사, 그리고 매장과 풍속의 역사.nohshin@korne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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