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크엔드포커스]“힘뺏겼다”-“힘더빼야” 男權운동 두 목소리

  • 입력 2005년 3월 17일 15시 47분


코멘트
《"요즘 시대는 여성들의 입김이 강해져서 집에서 TV드라마조차도 남편이 보고 싶은 것을 못 보는 실정이다." 전북 정읍시에 사는 서모 씨가 최근 헌법재판소에 호주제 폐지가 위헌이라며 제기한 헌법소원서 가운데 일부다. 그는 "자녀가 모성을 따를 수 있도록 한 부분은 우리나라 특성상 부적절하고 성씨의 정통성과 순수성, 일괄성이 괴멸돼 위헌 소지가 다분하다"고 주장했다. TV 드라마의 선택권이 성(性)의 권력관계를 가름하는 절대적 잣대는 아니겠지만 요즘 남자들에게 충분히 공감을 살 만한 얘기다. 1999년 군 가산점 폐지 등 여성계의 오랜 숙원이 해결되고 급진적인 여성정책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이런 변화에는 양성평등의 필요성을 공감하는 일부 친여(親女)남성들의 지지가 힘이 됐다. 이들은 "남자도 가부장적 제도의 희생자다. 진정한 양성평등을 통해 남자도 억압에서 해방돼야 한다"고 주장하며 소극적이나마 남성운동의 맥을 이어왔다. 그러나 남성중심의 제도가 하나, 둘씩 없어지면서 박탈감과 위기감을 드러내는 남성들이 적지 않다. 그래서 잊고 있던 남성의 권리를 찾고, 의무는 여성도 함께 지도록 하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남자들 사이에서도 양성평등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해 크게 두 부류로 갈라지는 이른바 '남-남(男男)'갈등이 시작되고 있다.》

○ 안티 페미니즘 남성운동

여성운동가들에겐 ‘웃기는 소리’일 수도 있겠지만 남성들 사이에서는 ‘남권(男權)’ 회복 운동이 설득력이 없진 않다. 그동안 남자의 ‘희생’에 따른 당연한 ‘권리’가 차츰 사라진다는 위기감이 작용하고 있는 것.

남권운동이 본격화된 것은 1999년 헌법재판소가 군복무 가산점제를 위헌이라고 판결한 이후부터다. 헌법재판소는 공무원 채용시험에서 현역으로 군복무를 한 사람에 대해 가산점을 주는 것은 여성과 장애인에 대한 평등권과 공무담임권을 침해한다고 결정했었다.

이 판결은 남성들 사이에서는 ‘역차별’이라는 주장이 높았다. 그 후 인터넷 카페 등을 통해 다양한 남권단체가 생겼는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한국남성협의회다.

이들의 운동 목표는 “남성의 권리를 증진하고 복지를 구현하자”는 것. 정부 조직에 여성부를 별도로 둔 것처럼 남성의 권익을 보호하는 남성부도 설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또 각종 ‘남성 차별적’ 활동과 발언 등을 소개하고 집단행동에 나선다.

최근 이 단체의 이슈는 한국성폭력상담소의 ‘공공의 적’ 캠페인. 지하철에서 성추행을 하거나 성추행 가해자를 옹호하는 남성 등을 비난하는 이 캠페인에 대해 남성협의회는 “남성들만이 문제를 일으킨 것처럼 묘사했다”며 국가인권위원회 진정 여부를 검토하고 있다.

○ 프로 페미니즘 남성운동

남성운동의 또 다른 축에는 남성으로서의 권리보다는 남편으로서, 아빠로서의 권리를 먼저 찾으려는 사람들이 있다. ‘좋은 남편이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의 모임’ ‘평등문화를 가꾸는 남성들의 모임’ ‘딸 사랑 아버지 모임’ 같은 아버지 모임이 주축이다.

이들은 남성을 가부장제의 수혜자라기보다는 피해자로 본다. 한국의 아버지들은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가정생활은 외면한 채 경제활동만을 책임지는 권위적인 가부장의 역할을 강요받아 왔다는 것.

이들은 가부장제의 또 다른 피해자인 여성도 끌어안는다. 성매매특별법과 호주제 폐지도 당연히 찬성한다.

그러나 남녀가 권리를 함께 누리는 한편, 의무도 함께 져야 한다고 믿는다.

때문에 가정경제와 자아실현을 위해 직장생활과 가정생활을 양립하는 데는 남녀가 함께 책임을 분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맥락에서 이들 단체 일각에서도 남녀 공동 징병제를 조심스레 주장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딸 사랑 아버지 모임의 창립 멤버인 한국남성학연구회장 정채기(44) 강원관광대학 교수는 “남녀공동 징집을 논의할 시기가 됐다고 본다”고 말했다.

○ 남-남 갈등, 그리고 남-녀 갈등

남-남 갈등은 주로 양성 평등론자들에 대한 보수적 남성들의 공격으로 나타난다.

2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한나라당 김용갑 의원은 호주제 폐지에 반대하면서 “불편한 것 달고 있지 말고 떼어 버리라”고 일갈했다. 호주제 폐지에 앞장선 남성 의원들에게 던진 말이다. 발언이 나간 뒤 김 의원의 홈페이지에는 남성들의 반응이 빗발쳤다. “힘내세요”라는 반응과 “호주제 폐지를 막지 못한 사람들이나 떼라”는 의견이 엇갈렸다.

여성정책을 담당하는 여성부의 남성 공무원들은 “밤길 조심하라” “집이 어디냐”는 협박 전화에 시달린 나머지 웬만한 욕설에는 이골이 났다고 털어놓는다.

가사활동에 열심인 남성이 동료들에게 따돌림 당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얼마 전 한국 남성의 전화에는 35세 남성이 “맞벌이 하는 부인 대신 가사와 육아를 하느라 퇴근을 서두르는데 동료와 상사의 질책이 심해 괴롭다”며 상담을 해오기도 했다.

여성 이슈를 보는 보수, 진보 두 가지 시각은 남자 개인에게 혼재돼 있기도 하다.

대학교수 이모(35) 씨는 군가산점 폐지와 성매매특별법 시행에 찬성하는 프로 페미니즘 성향. 평소 가사와 육아 부담도 부인과 동등하게 나눈다. 그러나 호주제 폐지에는 떨떠름하다. “내 아이가 내 성을 못 쓰게 될 수 있다니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도대체 가족 안에서 내 존재는 무엇인가”하며 볼멘소리를 한다.

거꾸로 여권 의식이 높은 젊은 여성들은 “내 남편은 페미니스트를 가장한 마초”라고 불평하는 경우가 많다. 말로만 여성을 옹호할 뿐 호주제 등 실질적인 사안에서는 남성 중심의 사고를 버리지 못한다는 것.

이에 대해 정채기 교수는 “유전적 기억의 뿌리가 너무 깊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여권 의식은 불과 수십 년 전 형성됐지만 가부장적 관념은 수천 년 대물림된 것이어서 단시간에 바뀔 수 없다는 것.

남과 여, 권리와 의무, 전통과 현대 사이에서 줄다리기는 계속되고 있다.

곽민영 기자 havefun@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