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복교수의 만화칼럼]정통성과 폐쇄성

  • 입력 2002년 1월 17일 14시 48분


외국에서는 볼 수 없고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아주 독특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정통’(正統)의 강조이다. 정통 프랑스 요리, 정통 이탈리아 요리, 정통 궁중요리, 같은 맥락으로 심지어 주물럭 집에서도 원조(元祖)라는 말을 붙여 자신의 정통성을 강조한다. 세계 각국을 돌아다녀 보아도 식당 간판에서조차 정통성을 내세우는 나라는 없다. 프랑스 요리면 프랑스 요리고 이탈리아 요리면 이탈리아 요리지, 왜 굳이 정통요리임을 강조해야만 하나?

이는 한국인의 의식 저변에 뿌리내린 정통성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비롯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정통이란 곧 원형(原形:Original)을 변형, 왜곡시키지 않고 그 순수함을 그대로 유지해 왔다는 것으로 주변에 범람하는 유사품 또는 모조품과 다른 고유한 품격과 전통을 강조하는 것이다.

한국인의 정통성에의 집착은 험난했던 한민족의 역사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수천 번에 걸쳐 이민족의 침략을 받으며 살아오는 동안 만약 한민족 핏줄의 원형을 고집하지 않고 타민족에 대해 대동주의(大同主義), 포용주의로 감싸 안았다면 결국 혈통의 소멸로 인해 민족 정체성(正體性)자체가 사라졌을 것이다. 이는 곧 민족의 소멸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 민족은 역사적으로 극히 폐쇄적인 민족주의로 이민족과의 혼합을 기피했고 과민할 정도로 정통성에 집착해 왔던 것이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바로 한국의 족보(族譜)문화다. 중국에 끝까지 저항했던 고려시대까지는 족보가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대주의를 채택함으로써 중국과의 평화적 교류가 불가피한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이질적인 혈통의 유입을 막기 위해 문중(門中)의 구성원을 철저하게 분류했고 순수성의 유지를 위해 엄격한 서출(庶出)차별을 했다. 이러한 정통성에의 집착은 오늘날까지도 변하지 않아서 애완견 한 마리에도 족보가 있냐,없냐를 질문하고, 상대방을 폄하하는 말에 ‘족보에도 없다’는 표현이 쓰인다.

이러한 한국인의 의식구조는 글로벌시대의 이민족 문화간의 교류, 융화로 빚어지는 크로스오버(crossover)또는 퓨전(fusion)이라는 필수적인 과정을 자칫 잡탕, 변질된 하급문화 혹은 정통성을 훼손하는 문화적 사생아로 해석할 위험을 안고 있다.

시대가 시대이니 만큼 아무도 이의를 대놓고 제기하지는 못하지만, 오페라 가수가 대중가요를 부르고 순수(?)화가가 만화라도 그리면 상업적으로 타락했다는 부정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결코 적지 않은 것도 바로 정통성에의 집착에서 기인한다. 세계 제일의 고아 수출국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양을 극히 꺼리는 것은 혈통의 정통성을 지키려는 강박관념이 아닌가.

이러한 집착은 그토록 무섭게 몰려오는 외래문화 속에서도 정체성을 유지하여 김치 버거, 불고기 버거로 햄버거에 맞서고 할리우드의 융탄 폭격 속에서도 국산영화의 시장 점유율이 50%에 육박하는 문화적 기적(?)까지 창조했고, 한류(韓流)까지 창출해 냈다. 우직할 정도의 집착이 우리문화를 지켜온 원동력으로 작용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의 지나칠 정도의 폐쇄성과 배타성이다. 이제는 더 이상 완벽한 원형(原形)의 유지가 불가능하며 현실에 맞게 손보고 가꾸지 않으면 안된다. 그럼에도 아직도 전통(傳統)을 곧 정통(正統)으로 여겨 변형을 이단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전통은 전통으로, 그리고 응용으로 이원화하여 발전시켜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리고 여기에 정통성과 실리를 모두 얻을 수 있는 열쇠가 있다.

이원복(덕성여대 디자인학부 교수·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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