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복교수의 만화칼럼]독일인이 얄미워

  • 입력 2002년 1월 10일 14시 25분


지중해의 기나긴 해안선은 매년 봄부터 가을까지 전 유럽에서 몰려든 휴양객들로 북적인다. 성수기인 여름철, 특히 아이들 방학이 시작되면 그야말로 발 디딜 틈이 없기는 우리 나라 해변과 그다지 큰 차이가 없다. 자연 즐거운 하루를 보내려면 무엇보다 중요한 게 ‘좋은 자리’ 차지하는 것이다.

바닷가 모래밭이든 수영장 주변이든 전망 좋고 그늘 있는 곳을 차지해야지, 그렇지 못하면 구석자리에다 땡볕에 시달릴 것을 각오해야 한다. 그러니 아침마다 ‘좋은 자리’ 잡기는 전쟁을 방불케 한다.

전 유럽 바닷가엔 매일 새벽 믿을 수 없는 광경이 어김없이 벌어진다. 해도 뜨기 전인 꼭두새벽에 인파들이 마치 유령의 무리처럼 바닷가를 서성인다. 그들은 마음에 드는 가장 좋은 자리를 물색한 뒤 자기가 이미 맡아두었다는 표시로 수건이나 간단한 세면도구, 신문, 잡지 따위를 얹어놓는다.

해변의 자리가 지정석일 리 없고 선착순에 의해 결정되는 만큼 해도 뜨기 전 새벽에 나와 표시를 해두고 다시 침대에 들어가는 것이다. 제아무리 부지런을 떤다고 일찍 나가보았자 이미 쓸만한 자리는 모두 ‘점령’된 뒤다. 신경질 부려봐야 자기만 손해. 좋은 자리 차지하고 싶으면 새벽잠 설치고 해뜨기 전에 나서는 것이 유일한 가능성이다.

그런데 한가지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런 얌체(?)라면 얌체인, 아니면 부지런하다고 보면 너무 부지런한 사람들은 거의 예외 없이 1백% 독일인들이라는 것이다. 다혈질인 프랑스인들, 이탈리아인들은 욕은 바가지로 퍼부으면서도 달콤한 아침잠을 중간에 희생(?)한다는 사실이 너무 끔찍해서인지 언제나 독일인이 차지하고 남은 자리로 만족해야만 한다. 그렇다고 독일인들이 새벽에 일어나기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드느냐하면 그것도 아니다. 새벽 두 세시까지 마실 술 다 퍼마시고 코가 비뚜러진 상태로 침대에 들어서도 다음날 새벽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유령처럼 해변으로 간다.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부지런 떨게 만드는가?

바로 ‘두려움’이다. 좋은 자리를 빼앗길지 모른다는 두려움, 그로 인해 비싼 돈 지불하고 누리기 위해 온 휴가의 즐거움이 훼손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게르만족들이 철저하고 완벽하고 조직적이고 모든 것을 치밀한 준비아래 추진해 나간다는 속성은 이미 정평이 나있다. 독일인보다 더 지독한 완벽주의자가 있다면 망설임 없이 스위스와 일본사람들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세나라는 모두 19세기초까지 가난한 나라였고 20세기에 눈부신 비약을 거듭하여 세계 정상수준에 오른 나라들이다. 독일과 스위스는 19세기 초까지 유럽의 3류국가로 가난하기 그지 없었으며, 일본도 명치유신 이전까진 세계사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나라였다. 이런 나라들이 갑자기 부강한 나라가 되고 보니 국민들은 지금까지 누리지 못한 것을 누릴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더욱 모든 일을 치밀하고 완벽하게 추진해간다. 일본 속담 ‘90리를 가야 반이다’는 우리의 ‘천리길도 한걸음부터’와 얼마나 다른가? 한국인의 ‘빨리빨리’도 바로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데 이렇게 느리게 해 나가다가는 목적한 것을 못 이룰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제로 상태에서 시작한 한국인의 60∼70년대 ‘없는 자의 두려움’이 바로 ‘빨리빨리’ 증후군 아닌가.

어느 나라의 국민이든 그들 정서의 저변에는 바로 ‘두려움’이 버티고 있고, 이것이 바로 국민성을 형성하는 기초일 것이다.

이원복(덕성여대 디자인학부 교수·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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