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말한다]'근대성의 유령들'/영화는 시대를 말한다

  • 입력 2000년 2월 18일 19시 2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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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성의 유령들' 김소영 지음/씨앗을 뿌리는 사람들 펴냄 ▼

물질적 풍요를 보장하는 산업화, 신이나 어떤 절대자로부터 독립된 주체의 자각, 국민이 주인이 되는 정치체제의 건설, 부당한 권력에 의해 억압받지 않는 개인 권리의 법적 보장, 사회적 신분 이동을 가능케 하는 교육 제도의 확립….

우리는 근대화의 길을 걸어왔고 그 성과를 함께 누리려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근대화의 찬란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와 시민 의식 속의 전근대성 또는 봉건성을 공격하는 포성은 끊이질 않는다. 포성이 들린다는 것은 아직 봉건성이라는 표적이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교수인 저자는 한국영화 속에서 봉건성의 현존과 그 메커니즘을 읽어낸다. 그는 이를 드러내는 좋은 소재로 판타스틱영화에 주목한다. 1967년작인 김기덕감독의 ‘대괴수 용가리’와 권혁민감독의 ‘우주괴인 왕마귀’ 등에서는 전근대적인 괴물의 위협 앞에 무기력하게 흔들리는 첨단과학문명의 근대국가를 볼 수 있다. 전근대사회의 잔재로 남아 근대를 위협하는 전근대적 의식의 힘이 이런 영화를 통해 드러난다는 것이다. ‘구미호’ ‘퇴마록’ ‘여고괴담’ 등의 공포도 근대사회의 번영과 안정을 단숨에 뒤흔들어 놓을 수 있는 전근대적 귀신들의 위협이다.

저자는 “이런 국가적 단위의 욕망과 위기감 그리고 불안은 다른 한편으로는 남성성의 불안과 맞닿아 있다”고 주장하며 여자귀신(女鬼) 이야기에 주목한다. 김기영의 ‘하녀’, 신상옥의 ‘이조괴담’과 ‘천년호’, 이유섭의 ‘원녀’ 등 원한을 품고 죽은 여귀들의 이야기는 한국의 전형적 괴기담이다. 조선사회의 유교적 가부장제에서 억압받아 원혼으로 떠돌던 여귀들의 이야기는 1960∼70년대, 어쩌면 지금까지도 이 사회에서 희생을 강요당하는 여성들의 의식을 반영하며 팬들을 모은다.

게다가 남성 중심의 기계문명 사회에서 여귀는 유교적 가부장제의 유산뿐 아니라 자본주의의 착취까지 이중으로 감당해야 하는 여성들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저자는 그 대표적인 영화로 가부장제적 가정을 꿈꾸며 자본주의사회의 희생양이 되는 여인들을 그린 임권택감독의 1986년작 ‘티켓’을 든다.

멜로드라마 역시 좋은 소재다. 김교수는 “컨텍스트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멜로드라마 영화는 강제된 근대화 산업화의 시기에 잔존해 있는 유교적 가부장 문화와 새롭게 부상하는 근대문화가 서로 경쟁하며 협상하는 공간이 되곤 했다”고 지적한다. 근대화 서구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전통적 가부장의 특권이 사라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으로부터 모종의 남성적 불안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 예로 이봉래의 ‘삼등과장’, 강대진의 ‘마부’, 신상옥의 ‘로맨스 그레이’, 조긍하의 ‘육체의 고백’과 같은 1960년대 홈 멜로드라마를 이야기한다.

독일의 미학자 에른스트 블로흐가 말했듯이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현재를 점유하는 것은 아니다.” 최근 몇 년간 벌어진 우리 사회의 ‘근대성’ 논쟁도 알고 보면 이런 ‘동시대의 비동시성’을 어느 정도로 인정하느냐의 문제였다. 우리 사회는 이미 근대를 넘어 탈근대의 사회에 진입해 있다든가 아니면 우리 사회는 근대사회라고 하기에는 아직 봉건잔재를 너무 많이 가지고 있다는 등의 논의였다.

하지만 이런 논의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지식인 사회의 담론 수준에서 맴돌다 잦아들고 말았다. 그 원인은 무엇보다도 우리 사회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분석을 결여한 공허한 논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작년 이맘 때 자신을 ‘목수’라고 소개하는 미술평론가 김진송씨가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현대성의 형성’(현실문화연구)이라는 책을 내놨을 때 그 동안 근대성을 앞에 놓고 떠들어 대던 이들이 머쓱해 하는 광경을 곳곳에서 목격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10여 년 동안이나 잡지, 삽화, 만화 등 1920∼30년대의 문화 현상을 꼼꼼히 뒤적인 성과였다.

그 책에서 우리는 역사교과서에서 배웠던 30년대 일제식민지의 병참기지 대신 근대화의 물결이 밀려드는 30년대 서울 거리를 구경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후로도 1년 동안 우리에게 30년대 이후 근대화돼 가는 서울 거리를 그처럼 생생하게 보여주는 책은 없었다.

한편으로는 1920∼30년대와 비교도 할 수 없이 복잡해진 이 시대의 문화 현상들을 읽어낸다는 일이 너무도 엄청난 일이라 엄두를 내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문화평론가라는 명함을 내미는 시대에 우리가 편편이 흩어진 봉건과 근대와 탈근대의 단편들만 들여다 봐야 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나온 김교수의 책은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문화인 영화를 통해 이 시대를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생생한지를 절감케 한다. 1960∼70년대를 중심으로 다루는 이 책은 너무 가깝기에 그냥 스쳐지나고 마는 우리의 삶과 의식을 비판적으로 읽어 낼 수 있게 한다. 다만 아쉬운 점은 그의 눈을 통해 읽히는 우리 사회가 너무도 가부장제의 그늘과 억압에 눌린 어둠에 갖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실제 ‘밝기’인지 아니면 그의 ‘색안경’ 때문인지는 추후 또다른 역량있는 필자에 의해 드러나게 될 것이다. 279쪽 1만3000원

<김형찬기자·철학박사> 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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