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말한다]'순진함의 유혹'/惡의 근원찾기

  • 입력 2000년 1월 14일 18시 23분


▼'순진함의 유혹' 파스칼 브뤼크내르 지음/동문선 펴냄▼

문제는 다시 ‘개인’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저 유명한 명제로부터 탄생한 합리적 이성의 주체 ‘개인’. 그러나 20세기의 후반기는 그 절대적 주체를 그저 “근대의 발명품”(미셸 푸코) 정도로 철저히 평가절하했던 시기였다. 그 합리적 이성이 무엇을 했는가, 이성의 이름으로 사회를 거대한 감옥으로 만들지 않았는가, 인간의 인간에 의한 대량학살을 정당화하지 않았는가라는 뼈아픈 성찰이 이유였다.

그러나 저자 뷔르크네르가 책 첫 문장에서 단언한대로 ‘현대의 중추는 개인’이다. 이것은 가치평가 이전의 현실이다. 앤서니 기든스가 저서 ‘현대성과 자아정체성’에서 언급했듯이 현대란 ‘한 극단에는 지구적인 영향력이, 다른 한 극단에는 개인적 성질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개인인가. 아니 어떤 개인이어야 하겠는가.

먼저 저자의 ‘현대적 개인’에 대한 냉소적 분석에 귀기울여보자. 저자는 개인의 행동양식의 특성을 ‘순진함(Innocence)’에서 찾는다. 그러나 ‘순진’은 때묻지 않음의 의미가 아니다.

“자신은 어떠한 불편도 감수하려 하지않고 자유의 혜택만을 누리고자 하는 것”이며 “나는 죄가 없으니 나를 나 자신이 저지른 행위들로부터 구원해 주소서”라고 아우성치는 병적인 현상이다.

책임지지 않으려는 태도는 유아적인 행동경향(Infantilism)과 희생화(Victimisation)의 두가지로 특징지워진다. 결코 어른이 되지 않으려는 ‘늙은 아이들’과 코소보처럼 쌍방이 순교자를 자임하며 테러를 정당화하는 세계 각국의 분쟁들이 그 예다.

저자는 “어른이 된다는 것은 한계를 배우는 것이고 우리의 터무니없는 소망들을 철회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자율적이 되려고 애쓰고 자신에 대해 초연한 만큼 자신을 창조하는 능력을 가지려고 애쓰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저자의 눈에 비친 오늘날의 개인의 모습은 어른이 아니다. ‘지나칠 정도로 자신의 독립에 마음을 쓰지만 만족을 모르고, 독립을 원하면서도 동시에 보살핌과 도움을 요구하는’ 모순된 것이다. 게다가 이들은 집단적으로 자신들의 유아기질을 만족시켜줄 ‘딸랑이와 요람을 향해’ 달려간다.

이제 현대인들은 키 하나만 누르면 과거의 황제가 누리던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을 구가할 수 있는 ‘상품의 은하계’에 살고 있다. 그러므로 명제는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로 바뀌었다. 기술은 우리를 매혹시키는 만큼 평범하게 돼 버렸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혜택을 누리며 사는지에 대해서도 감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갖고 싶은 장난감 앞에서 “내 거야”라고 발을 구르는 어린아이처럼 채워지지 않는 욕망에 대한 성마른 분노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개인의 무책임한 자유에 대한 저자의 반발은 때로 강한 보수논리나 프랑스 우월주의로 읽히기도 한다. 예를들어 저자는 미국의 페미니즘에 대해 “그 호전성 때문에 남녀 쌍방의 공존이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됐다”고 지적한다. 쌍방 각자가 모욕받은 자의 위치만 채택할 때 남녀관계에서 남는 것은 전쟁 아니면 분리일 뿐이라는 것. 그리고 이것은 서로 “내가 억압받은 자”라고 말하는 희생화의 전염법칙을 낳는다. 그러나 미국이 남녀에게 동등한 가치를 부여한다는 이상의 이름으로 광적으로 법적 체계만 강화하면서 남녀간 분리를 조장한다면 프랑스는 분열보다 친화에 중점을 둔다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언뜻 유치한 ‘프랑스 지상주의’가 읽힌다.

저자의 ‘개인’에 대한 이런 빈정거림은 그러나 단지 냉소를 위한 것이 아니다. 저자의 궁극적인 걱정은 이 ‘개인’이 자신의 삶의 터전인 ‘공동체’를 파괴하고 있다는 데 있다. ‘우리는 우리에게 걸맞는 것을 공동체로부터 얻어내면서도 그밖의 사람들을 위한 협력은 거부한다’는 것이다.

과연 인류는 2차대전 아우슈비츠 같은 홀로코스트를 통해 각성했을까. 저자는 고개를 내젓는다. 역설적이게도 하룻밤에 코소보와 쿠르드난민 등 지구상의 온갖 처참을 뉴스시간에 목격하면서도 그에 대한 책임감을 갖기 보다는 “나는 전혀 힘을 쓸 수 없다”는 무력감을 강화하는 쪽으로 전개된다는 점이다. “실로 이상한 타락은 악에 대한 기억이 우리를 불의에 민감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불의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을 강화시킨다는 것이다!”라고 저자는 한탄한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퇴행하고 말 것인가. 저자는 이미 그 유효성을 잃어버린 계몽의 어조로 “결국 전진하는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다.그것은 민주주의 이성 교육 책임 신중함과 같은 위대한 가치들을 쉬지 않고 심화시키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개인을 공동체주의와 대면시켜 ‘자신에 대한 배려와 세계에 대한 배려가 대결하는 것을 보도록’ 그 긴장관계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도 말한다. 공동체가 개인을 억압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공동의 운명에 대한 무관심을 합리화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근대적 개인의 탄생을 낳았던 프랑스 출신 에세이스트의 이 신랄한 성찰. 개인의 해방과 권리 의무에 대한 기초개념에 대해서조차 종종 합의를 이루지 못하는 우리 사회에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하는 책이다. 김웅권 옮김 344쪽 9000원. 95년 프랑스 메디시스상 수상작.

<정은령기자> r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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