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책을 말한다]김형찬/'악마의 문화사'

  • 입력 2000년 1월 7일 19시 53분


▼'악마의 문화사' 제프리 버튼 러셀 지음/최은석 옮김/황금가지 펴냄▼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 유태인 대학살,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핵폭탄 투하, 발칸반도의 인종청소, 기근으로 죽어가는 수천만의 아이들, 핵무기에 의한 지구멸망의 위협….

20세기의 역사를 보면 이것이 인간의 역사인지 악마의 역사인지 의심스럽다.

“우주를 파괴하기 위해 자신이 지닌 힘을 한계치까지 발휘하는 자가 곧 악마다. 그렇다면 우리로 하여금 인류를 섬멸할 수도 있는 무기를 사용하도록 휘몰아대는 힘은 삶 자체를 부정하는 악마의 힘과 같은 것이 아닐까?”

미국 산타 바바라 캘리포니아주립대의 역사학 석좌교수인 저자는 아우슈비츠나 히로시마 같은 집단적 ‘악의 현상’을 바라보며 그 ‘악’의 근원을 추적했다. 저명한 신학자이기도 한 그가 1977년부터 10여 년에 걸쳐 미국 코넬대 출판부를 통해 낸 ‘악마:고전 고대부터 원시 기독교시대까지의 악의 인격화’ ‘사탄:초기 기독교 전통’ ‘루시퍼:중세의 악마’ ‘메피스토펠레스:근대 세계의 악마’ 등 네 권의 저서는 이미 악마의 역사라는 주제를 신학 민속학 문학 등 다방면에 걸쳐 진지하게 고찰한 신학사의 명저로 꼽힌다. 1988년 출간된 이번 저서(원제:The Prince of Darkness)는 이 책들의 내용을 종합한 완결편에 해당한다.

‘악’ 또는 ‘악마’의 개념에 대한 그의 추적은 고대신화에서 20세기말까지 이어진다. 인간이 인간임을 부끄러워해야만 했던 20세기의 비극들을 기억한다면 이른바 ‘근본적인 악’에 대한 저자의 탐구가 인간 자신에 대한 한 신학자의 처절한 반성의 여정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는 이러한 여정의 동지로 유태인 출신의 독일 사상가 한나 아렌트가 있었음을 상기시켜 준다. 아렌트는 관료화된 사회조직 속에서 아무런 반성없이 유태인 학살을 자행했던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바라보며 ‘인간의 조건’이 무엇인지를 고민했었다. 아렌트의 접근이 철학적이었다면 러셀의 접근방식은 문화사적이다.

“선과 악 모두 신에서 기원한다. 사람들은 자기 마음속에 선과 악의 긴장이 있음을 알아차리기 때문에 신에게도 그와 상응한 긴장이 있음을 보게 된다.”

인간 내면에 있는 선과 악의 긴장은 신에게 투영된다. 선악의 대립은 다시 외화(外化)되어 악은 선한 신으로부터 독립된 실체로 신과 대립하기도 한다. 신(神)과 악(惡)의 병존, 즉 ‘완전’하고 ‘순선(純善)’한 신이 창조한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한다는 문제는 신학의 오랜 딜레마였다.

인도나 페르시아 종교처럼 다신교인 경우에는 선한 신들과 악한 신들의 대립이나 ‘한 가슴에 두 영혼’을 가진 여러 신들의 존재로 설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문화사적 관점이라고는 해도 주로 서구 기독교사의 맥락에서 ‘악마’의 개념을 추적하는 저자로서는 유일신교인 유태교나 기독교의 전통 속에서 해결책을 찾기가 쉽지 않다.

러셀교수는 고대 이집트, 그리스, 헤브루 등의 신화에서부터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그리고 중세를 거치며 양면적인 신이 선하디 선한 하느님과 악한 악마로 나뉘게 되는 과정을 살핀다. 이런 구분은 특히 신약성경에서부터 분명해진다.

“신과 마왕 사이의 투쟁은 신약성경의 핵심이다. 신약성경의 세계관이란 곧 신을 따르든가 악마에 복종하든가 양자 택일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선악의 구분을 통해 육신, 현세 등의 세속적 부문과 질병이나 죽음 같은 불길한 체험과 관념은 악마의 영역이 된다. 그후 다양하게 전개되는 선과 악의 긴장과 대립, 악 또는 악마에 대한 인식의 변화에 관해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윌리엄 오컴, 마틴 루터, 데이비드 흄, 장 자크 루소, 샤를 보들레르, 에드거 엘런 포 등 수많은 신학자와 사상가, 작가들의 예를 들어 설명한다.

이런 긴 여정을 거쳐 저자가 도달하는 지점은 ‘악’에 무감각하고 냉소주의적이 된 20세기말의 현실이다. 여기서 그는 한나 아렌트와 다시 만난다. 그는 현대 서구사회를 떠받치는 ‘유물론’적 관점과 오로지 ‘과학적’인 것만을 요구하는 ‘합리적’ 사고방식 속에서 ‘악’의 문제가 도외시되고 있다고 경고하며 반성적 사고를 촉구하는 것이다.

“근본적 악은 인간의 의식을 초월해 있는 힘이며, 따라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왜곡하지 않는 한 합리적인 분석이나 통제로 이를 해부할 수 없다. … 이는 악을 있는 모습 그대로 알아차리는 사려 깊은 개인적, 사회적 관심의 문제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악에 맞서 선한 세력의 결집을 주장하는 선악의 이분법과는 분명히 다르다. 그는 집단이기주의적인 선악의 편협한 이분법이 범람하는 한국사회에 서구 문화사의 다양한 선과 악의 역사를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2∼3년 사이 ‘신의 역사’ ‘천국의 역사’ ‘지옥의 역사’ ‘신화로 보는 악과 악마’(이상 동연), ‘신의 전기’(지호), ‘악마이야기’(예문) 등 종교에 대한 문화사적 연구 성과들이 국내에 연달아 소개되고 있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진작부터 신을 상정하지 않고 자연과 인간의 관계 또는 인간 내면의 문제로 ‘악’을 논의해 온 유교 불교 등의 선악사상이 거의 고려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406쪽 1만5000원

<김형찬기자·철학박사> 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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