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현의 우리거리 읽기]서울 인사동길, 곳곳에 옛 자취

  • 입력 1999년 4월 19일 18시 58분


인사동길 이야기만 나오면 건축가들은 웃는다. 입가에는 염화시중(拈華示衆)의 미소가 감돈다. 건축과 학생들의 졸업전시회 주제로도 인사동길은 빠지지 않는다. 모두 “우리에게 이런 길이 있다니…” 하고 흐뭇해한다.

조선시대 서울의 주택가 1번지는 삼청동, 가회동으로 대표되는 북촌이었다. 경복궁과 창덕궁의 사이. 북악산 아래 경치도 좋은 동네니 고관대작들이 모여 사는 건 당연했다. 인사동길은 이런 고급주택가와 육의전거리를 연결하는 길이었다. 주변에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이 얼룩덜룩 섞여 있었다. 임금님 대신 총독의 조회로 시작된 20세기는 이 거리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권문세가들이 쇠락의 길을 걸었다. 할아버지가 선혜청 당상관이었어도 당장 먹고 살 길이 없어졌으니 가진 것들을 내다 팔기 시작했다. 도자기도 그림도 들고 나왔다. 집도 팔았다.

대저택들은 잘게 나뉘었고 소위 개량한옥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작은 집들이 빼곡이 들어서면서 거리는 굽이굽이 미로가 되었다. 창호지가 아닌 유리가, 분합문(分閤門·들어올려 매걸 수 있게한 창살문)이 아닌 미닫이문이 달린 집들이었다. 기둥에는 주련(柱聯·기둥의 글씨) 대신 함석 물홈통이, 벽에는 회(灰) 대신 타일이 붙여졌다. 인사동길에는 미술품상가가 형성되었다. 거래되는 미술품의 값은 갈수록 높아만 갔다. 조용한 곳에서 식사 한번 하지 않고 단원(檀園)과 겸재(謙齋)가 오가는 거래가 이루어질 수는 없었다. 뒷거리의 한옥들은 식당으로 바뀌고 요정으로 변했다. 불편하기만 한 한옥을 고쳐 한정식집으로 바꾼 주인은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이 거리는그렇게 변해왔다.

우리 도시의 변천사에서 과거는 지워야 할 대상이곤 했다. 그러나 인사동길에서 과거는 지워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 길이 유물 전시장은 아니다. 과거에는 현재가 차곡차곡 덧칠되었다. 달력사진에 나올 듯한 화려한 한복보다는 감물들인 생활한복이 어울리는 거리. 은밀한 전화통화로 거래되는 조선백자는 자물통 채운 상자에 들어있고 진열장에는 일 주일 전에 경기도 여주에서 구워온 청자가 놓여있다. 수묵화도 있고 유화도 있다. 이리저리 섞인 어제와 오늘, 그것이 이 거리의 힘이다.

고전으로 새겨질 문화는 이 거리에 계속 퇴적되어야 한다. 유명한 화가가 아니고 실력 있는 화가가 대접받는 거리여야 한다. 길거리 화가라도 절집 부뚜막에서 땔감이나 고르다 하산한 실력이라면 깔고 앉은 낚시의자를 다시 접어야 한다. 파리 몽마르트르나 런던 피카딜리 서커스의 길거리 화가들을 무색케하는 실력자들만이 이 거리를 경쟁력 있는 문화의 거리로 만들 수 있는 법. 인사동길에는 가장 꼼꼼히 디자인한 가로등이 들어서야 한다. 가장 신중히 고른 휴지통이 설치되어야 한다. 건물의 덩치는 규제되어야 한다. 최선을 다해 설계한 건물이 최선을 다한 모양으로 지어져야 한다. 지금은 없어져 다행이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극장간판 같은 일주문이 버티고 있었다. 그러한 싸구려 팻말로 이 거리를 우습게 만들어선 안된다.

이곳도 장사를 하는 곳인지라 거리에는 간판들이 즐비하다. 그러나 붉고 푸른 아크릴 간판이 아우성치지는 않는다. 쏘고 튀는 이름보다 휘영청 늘어진 이름들이 작지만 꼼꼼히 만든 간판들에 담겨 있다. 여기는 간판도 시를 쓰는 곳이다.

일요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자동차의 통행이 금지되면서 이 거리가 달라졌다. 철문이 닫혀지던 시간대에도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거리가 담는 내용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싸구려 목걸이와 호박엿도 거리를 기웃거렸다. 인사동과 하룻밤 풋사랑을 나누려는 사람들이 만리장성을 쌓으려는 사람들보다 많아졌다. 파란 눈의 아저씨와 아주머니들도 모여들었다.

일요일의 인사동길은 신나는 장터지만 중중에는 노상주차를 한 자동차들 때문에 걷기도 힘들다. 학고재화랑 아래부터는 보도도 한 쪽에만 있다. 일제시대에 형성된 거리에 아스팔트 포장만 했다고 우리 시대가 할 일을 다 했다고 할 수는 없다. 전통문화에 불법주정차라는 항목도 있던가. 이 길도 보행자 전용도로가 되어야 한다. 가로수도 심고 벤치도 놓아, ‘쉬어도 돈 내고 쉬라’는 상업주의를 잠재워야 한다. 지구 저쪽 편에서 온 나그네들에게 쉼터 하나 내주지 않는 야박함이 우리의 전통이던가. 주머니는 비었어도 가득한 마음을 나눠주던 것이 우리의 전통 아니던가.

서울특별시 새마을별관에서 시작한 인사동길은 홍백화방에서 끝난다. 일제시대에 뚫린 율곡로는 창덕궁 뿐 아니고 인사동길도 토막냈다. 길 건너에 보이는 백상기념관은 아스라히도 멀다. 그 너머에는 장안의 유명한 화랑들이 들어섰다. 이 끝에서 시민들의 발길이 돌아서는 한 인사동길은 미완성이다. 이 길은 이어져야 한다. 인사동에서 합죽선을 고르던 사람들이 사간동의 미술관, 경복궁의 뜰도 거닐게 되어야 문화의 거리는 완성된다.

인사동길 뒤편 미로 구석의 허름하기만 한 음식점들은 부담주지 않고 사람을 초대한다. 밥 먹으러 와서는 맛있게 밥을 먹지 집 투정은 하지 말라고 한다. 맛있는 음식은 짧은 치마의 도우미가 아니고 팔을 걷어 부친 주모가 해주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이 거리의 밥값, 술값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제대로 된 음식에 제대로 된 가격을 지불하라고 한다. 이곳 인사동의 자존심이기도 하다.

해가 저물면 종로쪽 어귀에는 포장마차들이 들어선다. 오늘만은 인사동보다 꼼장어와 소주 한잔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오렌지색 천막을 들춘다. 그러나 거나해진 이들의 생리적 요구를 받아줄 만한 장치는 아직 없다. 그냥 눈치껏 골목 어귀로 찾아 들어가 동네의 강아지들과 나란히 서야 한다. 외국인이 들고 있는 지도 어느 구석에도 공용화장실은 없다. 진정 화장실이 그 나라의 문화라면 우리의 문화는 심지어 이거리에서도 실종상태인가. 우리 도시에서는 ‘우리 공간’은 없고 ‘내 공간’만 있었다. 그러던 중 인사동을 사랑한다고, 이 거리는 우리의 거리니까 함께 가꿔 나가자고 하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인사동길에 파란 신호등이 켜졌다. 거리는 시민의 사랑을 먹고 자란다. 그 파란 신호등을 계속 밝힐 이는 바로 우리, 시민들이다.

서현(hyun1029@cholli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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