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현의 우리거리읽기]영등포역/숨결도 표정도 없는곳

  • 입력 1999년 3월 15일 19시 20분


낫과 망치의 시대는 갔다. 물레와 베틀로 옷감을 짜던 시대도 갔다. 엔진이 세상의 중심에 들어선 새로운 세상이 온 것이다. 사람들은 산업에 혁명이 일어났다고 이야기했다. 과연 세상이 바뀌었다. 세상이 변하면 새로운 건물이 등장한다. 산업혁명 덕에 공장이 들어섰다. 만국박람회장도 필요해졌다. 신고산을 뒤흔들며 기차가 등장했으니 기차역도 필요해졌다.

생전 처음 보는 문제를 풀어야 하는 건축가들은 빈 공책을 들고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어떤 모양으로 이 건물들을 그려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교과서 어디에도 답이 없었다. 역사책을 뒤지는 건축가도 있었다. 옛날 신전이나 왕궁의 껍데기에서 먼지를 털고는 새 건물에 뒤집어 씌웠다. 르네상스와 바로크 양식이 버무려진 서울역이 그렇게 써낸 답안지의 하나였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축가도 있었다. 철과 유리로 만들어진 건물을 도화지에 그렸다. 엔진의 시대에는 장식은 필요 없다고 이야기했다. 새로운 모양의 건물들이 거리에 들어섰다. 에펠탑은 그렇게 세워졌다.

이 땅에서 산업화는 기운 센 친구들의 힘 자랑으로 시작되었다. 전기도, 전차도 그렇게 들어왔다. 철도도 깔렸다. 철도는 새로운 건물 뿐 아니라 새로운 거리도 만들었다. 철도가 놓이고 제방이 쌓이기 전 영등포는 한산한 들판이었다. 경기도 시흥군 영등포리(始興郡 永登浦里). 그러나 경인선이 개통되면서 이야기가 달라졌다. 경부선도 놓였다. 관악산을 관통할 수 없던 철도는 안양 쪽으로 우회하였다. 자연히 영등포를 거쳐야 했다. 영등포는 한국 최대의 두 항구 인천 부산을 서울과 이어주는 요충지로 변했다.

물품의 이합집산이 이루어지면서 일본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방직, 제분, 기계 공장이 들어섰고 영등포는 제조산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한국에 이식된 산업혁명의 현장이었다. 한국전쟁이 끝나가면서 영등포에는 새 얼굴들이 등장했다. 서울을 떠났던 피란민들은 군 작전때문에 한강을 건널 수 없게 되자 영등포에서 피란짐을 풀었다. 거리 구석구석은 아예 주저앉은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시장도 생기고 역은 더욱 북적거렸다.

피란민들은 이 거리에서 공장노동자로 변했다. 강 건너 여의도가 개발이 되고 새로운 금융중심지로 화려한 조명을 받아도 영등포는 먼지, 냄새 가득한 산업지대였다. 영등포 역 앞은 노동자와 서민들의 상업지대가 되었다. 여의도에서는 증권회사 직원들이 넥타이를 매고 술을 마셔도 영등포 뒷골목에서는 청바지가 어울렸다. 검은 색의 승용차보다는 트럭과 버스가 많은 거리. 예수 믿고 천당 가고 시주하고 극락 가라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 거리. 뿌리를 이야기할 서원도 사찰도 없고 잠시 고단한 육신을 기댈 공원 한 뼘도 없는 거리. 영등포 경찰서는 이사를 가면서도 땅 한 귀퉁이를 떼어 공원용지로 내줄만한 여유도 없었다.

이 거리는 턱없이 좁다. 인도도 차도도 좁다. 인도 위에는 노점이 빼곡이 들어서 있고 걸을 수 있는 폭은 두 사람의 어깨 너비를 간신히 넘나든다. 지하도입구가 거리 폭을 모두 차지하고 있으니 모두들 지하로 걸어다니라는 이야기인가.

이 거리의 변화는 백화점에 의해서 선도되었다. 유동인구가 많으니 당연히 상업자본이 눈독을 들였다.

우선 역에 변화가 생겼다. 대합실 하나만 덩그라니 있던 역을 새로 지어 줄 테니 그 위에 백화점을 짓게 해달라고 했다. 누이도 좋고 매부도 좋은 아이디어 아닌가. 산업혁명시대에 보지 못하던 새로운 건물타입이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롯데 백화점은 상도 받았다. 덕택에 이 거리에서는 백화점, 재래시장, 노점이라는 상업형태의 시작과 끝이 한 줄에 서 있게 되었다. 당신에게 맞는 쇼핑의 장소는 당신이 정하라.

새 건물의 기둥 한 귀퉁이에는 기념패가 붙어있다. ‘…새롭고 뛰어난 기술과 창의성을 발휘함으로써 타에 귀감이 됨은 물론 선진 수도 서울의 건축문화 창달에 크게 기여하였으므로 제10회 서울시 건축상을 드립니다.’ 이 건물은 어떤 귀감이 될까. 건축 교과서는 건물은 사람과 친근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덩치가 큰 벽, 그런 건물은 가로로부터 멀리 들여놓으라고 한다. 백화점은 창이 필요 없는 건물. 이 건물은 표정도 없이 밋밋하기만 한 절벽을 거리에 바짝 붙여놓았다. 큼직한 코끼리의 허리가 밀고 들어섰으니 개미나라의 거리는 답답하기만 하다. 건축 교과서는 기차역이건 공항청사이건 여행의 즐거움을 건물이 이야기해 주어야 한다고 한다. 백화점의 부록처럼 되어버린 영등포역은 어떤 여행의 즐거움을 이야기하는가. 대합실의 천장은 낮고, 개찰 후 플랫폼에 이르려면 동굴 같은 통로를 지나야 한다. 이것이 새로운 창의성의 결과물인가.

백화점 앞에는 보도도 새로 깔았다. 거리는 분명 전보다 깨끗해졌다. 그러나 당신은 버스를 타려면 구석을 찾아들어야 한다. 그 구석은 변한 것도 없이 노점상만 늘었다. 거리의 새로운 주인, 백화점으로 들고 나는 차를 위해 울려대는 호루라기 소리를 지나 좁기만 한 인도에서 튀김과 붕어빵 사이에 끼어있어야 한다. 스무 개에 달하는 노선 버스는 어디에서 설 지 모른다. 기다리던 버스가 저기 서면 백화점에서 산 물건 보따리를 들고 뛰어야 한다. 그 사이 버스는 떠났다. 땀을 닦고 다음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날은 어두워진다.

석양이 깔리기 시작하면 신세계백화점 뒷거리의 검은 커튼이 걷힌다. 홍등(紅燈)이 밝혀지고 밤의 요화(妖花)들이 늦은 기지개를 켠다. 이 거리에서 은밀한 쇼핑이 시작된다. 시간이 더 흐르고 자정이 넘으면 하루에 한 번 인도의 폭이 넓어지는 때가 된다. 열차운행이 모두 끝났다는 안내방송이 나오면 거리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은 차도를 점거하고 택시를 잡는다. 부평, 역곡, 인천을 외치는 총알택시가 거리에 장전된다.

화석연료를 태우는 엔진이 아니고 인터넷사이트를 항해하는 검색엔진의 시대가 왔다. 영등포앞 거리는 이제 어느 엔진을 달고 어디에서 어디로 연결되는가.

서현<건축가>hyun1029@cholli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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