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용기타]인간 같은 로봇, 로봇 같은 인간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6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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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일러플레이트/폴 기난, 아니나 베넷 지음/김지선 옮김/168쪽·2만5000원/사이언스북스
◇어덜트 파크/오영진 글, 그림/272쪽·1만3000원/창비

1911년 미국의 한 방직공장에서 찍은 여성 아동 노동자들의 사진에 보일러플레이트를 합성해 놓았다. 책엔 로봇과 그를 만든 아치볼드 캠피언 박사가 ‘억압적 아동 노동’을 막는 데 일조했다고 나온다. 원래 사진은 아동노동의 참상을 카메라로 고발한 미국 사회기록사진의 선구자 루이스 하인(1874∼1940)의 작품이다. 사이언스북스 제공
1911년 미국의 한 방직공장에서 찍은 여성 아동 노동자들의 사진에 보일러플레이트를 합성해 놓았다. 책엔 로봇과 그를 만든 아치볼드 캠피언 박사가 ‘억압적 아동 노동’을 막는 데 일조했다고 나온다. 원래 사진은 아동노동의 참상을 카메라로 고발한 미국 사회기록사진의 선구자 루이스 하인(1874∼1940)의 작품이다. 사이언스북스 제공
로봇, 하면 뭐가 떠오를까. 물론 사람마다 세대마다 답이 다르겠지만 누군가의 머릿속엔 옛일이 떠오르지 않을까. 로보트 태권V부터 찌빠 짱가 터미네이터 메칸더V, 요즘엔 로보트 폴리까지…. 재밌는 것은 로봇이 ‘과거의 흔적’ 같은 기분이 들게 한다는 점이다. 이런 수준의 로봇은 분명 아직 도달한 적도 없는 미래 산물인데도.

‘보일러플레이트’와 ‘어덜트 파크’는 그런 면에서 닮은 대목이 많다. 단지 로봇을 소재로 삼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로봇이 추억을 잇는 매개체로 등장한다. 물론 그 추억이란 것은 개인이나 집단의 역사로 구분할 수 있다. 하지만 과거와 연결된 인간 본성을 일깨우는(혹은 마주하게 만드는) 게 로봇이라는 점에서 두 책은 묘한 연결고리를 지녔다.

만화 ‘어덜트 파크’의 한 장면. 흑백으로 처리한 명암이 인간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창비 제공
만화 ‘어덜트 파크’의 한 장면. 흑백으로 처리한 명암이 인간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창비 제공
먼저 ‘어덜트 파크’. 굳이 번역하면 ‘성인 놀이터’쯤 되는 이 흑백 만화는 한마디로 외롭고 쓸쓸한 어른들이 ‘대화 로봇’에게서 위로를 받는다는 설정이다. 현대사회에서 소통이 얼마나 중요한지, 마음 터놓을 상대가 얼마나 부족한지 다 아는 터에 ‘로봇이 인간보다 낫다’는 뻔한 결론이라면 그다지 울림도 없을 것이다. 동물이 사람보다 낫다는 말, 지겹게 들어 보지 않았는가.

하지만 이 책은 왜 인간이 로봇보다 못나져 가는지 그 ‘과정’에 주목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건 삶이란 경험이 만드는 족쇄 탓이다. 그저 물질이나 명예의 달콤함에 젖어버린 게 아니다. 켜켜이 쌓아온 인생이 실은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타인의 얘기를 듣지 않는 데 익숙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떠나보낸 아내에게 사랑을 증명하고파 장기를 파는 사내, 5년 동안 돌보던 식물인간 부인을 끝내 안락사시킨(정확하게는 팔아버린) 남편…. 그들은 하나같이 세상의 질곡에 허우적대는 피해자지만, 또한 자기 틀에 갇혀 상처 주고 상처 받기를 반복하는 존재다. 그러니 감정에 기대지 않기에 편견이 없는 로봇이 인간보다 나아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런 뜻에서 만화 끝자락에 ‘인간의 기억이 이식된’ 로봇의 마지막 대사는 여운이 짙다. “하여간 인간들은 도무지 신뢰할 수가 없어. 모든 걸 자의적으로 해석해 버린다니깐….”

정통만화인 ‘어덜트 파크’와 달리 ‘보일러플레이트’는 장르 구분이 쉽지 않다. 일종의 팩션(실화에 바탕을 둔 소설)인데, 19세 후반부터 20세기 초반에 한 과학자가 발명한 로봇이 미국의 역사 현장에서 활동했다는 줄거리다. 숱한 당시 사진과 그림에 로봇을 합성해 마치 진짜 존재한 증거인 것처럼 실어 놓았다. 로스앤젤레스타임스가 이 책을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기계 인간 버전”이라고 부른 게 수긍이 간다.

하지만 ‘보일러플레이트’는 결정적 차이가 있다. 영화가 미국의 ‘찬란한’ 역사를 조명하며 그들의 질리지도 않는 자기애 표출에 힘썼다면, 이 책은 그 대단한 발걸음 아래 무너지고 쓰러진 이들을 주목한다. ‘미군의 가혹한 공격’이었던 신미양요로 쓰러져간 조선인들부터 역시 미국과 서구열강의 무력에 희생된 하와이와 중국, 아프리카 백성들. 또한 자기네가 자랑하는 전쟁 승리는 실은 백인이 경멸했던 흑인으로 구성된 ‘버펄로 부대’(피부색이 닮았다고 붙인 별명)의 공이 지대했다. 경제발전이라는 축복의 뒤안길에는 채 피지도 못하고 스러져간 아동들의 노동착취가 피처럼 배어 있었다.

보일러플레이트가 지켜본 현장은 누구의 시선처럼 결코 아름다운 아메리카의 번영이 아니었다. 아무리 막으려 해도 가진 자들은 제 욕심 채우기에 급급했고, 무명씨(無名氏)의 죽음과 희생은 역사에 기록조차 되지 않았다. 저자들은 역사가 그 많은 공적을 세운 로봇을 기억하지 않는 근거도 여기에서 찾는다. 그는 가혹한 쟁취자도 추악한 승리자도 아니었기에, 그저 사라져갔다.

어쩌면 ‘보일러플레이트’건 ‘어덜트 파크’건 로봇들은 갸우뚱거릴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자신을 창조한 조물주인데 왜 이리도 결함투성이일까. 해답은 분명한데 왜 허구한 날 오답만 붙들고 머리를 쥐어짤까. 로봇에게 당부한다. 그 대답 찾으려 하지 마라. 그런 거 고민하면 너희도 인간처럼 된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보일러플레이트#어덜트 파크#로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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