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미 기자의 談담]“신격호, 차남 선호한건 사실… 반기문은 유엔총장에 맞는 사람”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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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신영 롯데 총괄고문(前총리)이 말하는 신격호 총괄회장과 반기문 총장

《 지난해 12월 28일 오후 노신영 전 국무총리(86)는 인터뷰하는 3시간 내내 말을 아꼈다. 그러니까 ‘노신영’이지 싶었다. 그는 전두환 대통령 시절 외무부 장관(1980∼1982년), 국가안전기획부장(1982∼1985년), 국무총리(1985∼1987년)를 역임했다. 하나같이 알고도 말 못할 게 많은 자리들이다. 마침 그를 만난 날 한일 외교장관회담이 열렸다. 일본 정부의 책임 인정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사죄, 위안부 피해 할머니를 위한 지원 재단에 일본이 정부예산 10억 엔을 지원한다는 내용이 알려진 직후였다. 노 전 총리는 “그만하면 잘됐어”라고 말했다. 재단 설립이 가장 좋은 선택이었을지 묻자 “글쎄. 그 이상은 하기 어렵지 않았나 생각해”라고 했다. 그를 찾은 건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94)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롯데 경영권 분쟁이 벌어지면서 고령인 신 총괄회장의 건강과 판단력이 진행 중인 9건의 관련 소송에 크게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노 전 총리는 1994년부터 2013년까지 롯데복지재단과 롯데장학재단의 이사장을 맡는 등 신 총괄회장과 친밀하게 지내왔다. 현재는 롯데그룹 총괄고문이다. 》

지난해 12월 28일 만난 노신영 전 국무총리는 “살면서 나보다 더 부지런한 사람을 둘 봤다. 관직에서는 반기문, 민간에선 신격호”라며 “그 둘이 행복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지난해 12월 28일 만난 노신영 전 국무총리는 “살면서 나보다 더 부지런한 사람을 둘 봤다. 관직에서는 반기문, 민간에선 신격호”라며 “그 둘이 행복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장남 집무실 들어오자… “너, 나가”

―최근에 신 총괄회장을 언제 만나셨습니까.


“한 달 됐나. 신 회장과 식사를 같이했어.”

김선미 기자
김선미 기자
그는 신격호 총괄회장을 시종일관 ‘신 회장’으로 불렀다. 2011년 차남인 신동빈 롯데 부회장이 회장에 오르면서 신격호 회장은 총괄회장이 됐다. 20년 넘게 신격호 회장과 인연을 맺어온 노 전 총리로서는 ‘신 회장’이란 호칭이 입에 붙었을 것이다. 40년 이상 나이가 적은 기자에 대한 반말 화법과 신 회장이란 호칭도 독자들에게 고스란히 전하려 한다.

―롯데 임원들에 따르면 신 총괄회장이 요즘 같은 말을 자주 반복한다던데요.

“나하곤 오랜 인연이 있어 그런가. 그렇지 않았어. 특별한 내용 없이 그냥 음식 얘기를 해서 그런가. 다만 한 가지, 귀가 잘 안 들리시더구먼.”

―어디에서 무슨 음식을 드셨나요.

“롯데호텔서울 34층 신 회장 집무실 식당에서 양식을 먹었어. 프랑스식이지. 그전에 나하고 식사도 여러 번 했거든. 이탈리아식 프랑스식 중국식. 물론 한국식도 하고…. 지금도 신 회장이 어느 요리를 제일 좋아하는지는 모르겠어. 여태껏 일본 요리는 없었던 것 같아.”

이때 우리가 만난 식당에서도 종업원이 주문을 받으러 왔다. 노 전 총리는 “레이디부터 주문해야지”라며 기자를 가리키더니 “난 한참 긴장해서 식욕이 없어졌어. 노신영이 누구 편들었다고 신문에 나면 신 회장이 뭐라 할까 걱정돼”라고 했다.

―한 달 전, 신 총괄회장과 둘이서만 식사하신 거죠.

“그럼. 가면 참 반가워해. 아 참, 우리가 식사하는데 큰아들(신동주 전 일본롯데 부회장)이 들어오더라고. 신 회장이 아들에게 ‘넌 왜 왔니’ 그러기에 이게 뭐 잘못됐나 했더니 다시 ‘너 나가’ 그러더라고. 안 나가니까 또 ‘너 나가’. 그제야 큰아들이 식당에서 나갔어.”

―지난해 여름 거동이 불편한 신 총괄회장이 장남과 일본엔 왜 간 걸까요.

“나도 그건 자세히 묻지 않았어. 두 아들 사이가 좋지 않다, 서로 후계자라고 주장한다는 건 신 회장이 알고 있지.”

―그동안 일본은 장남, 한국은 차남으로 후계 구도가 정해져 있던 것 아니었나요.

“내가 롯데에 몸담은 지난 20여 년 동안 신 회장이 차남(신동빈 롯데회장)을 상당히 선호했던 건 사실이야. ‘둘째가 우수하다’ ‘사업가로서 훌륭하다’는 말을 숱하게 들었거든.”

―경영능력은 차남이 우수하다는 건가요.

“그렇다고 형이 완전히 못났다 그건 아니야.”

신격호, 그동안 장남 언급 별로 안해

―그동안 장남에 대해서는 무슨 말이 없었나요.

“별 얘기가 없었어.”

노 전 총리는 말을 이어갔다.

“내가 참 부지런하다고 자찬(自讚)하는 사람이거든. 나보다 더 부지런한 사람을 못 봤는데 딱 한 사람 정부에 있었어. ‘저 사람은 잠도 안 자고 쉬지도 않나’ 한 게 반기문(72·유엔 사무총장)이야. 참 부지런하거든. 급한 일이 있어 ‘반기문’ 하고 부르면 언제고 달려오거든. 그런데 롯데에 와서 20년간 신 회장이 일하는 걸 보니 새벽이든 밤이든 어찌나 부지런한지. 저러니까 혼자서 큰 기업을 일궜구나 싶더라고. 그래서 생각했지. 나보다 부지런한 사람이 둘 있구나. 관직에선 반기문, 민간에선 신격호. 그 신 회장이 요즘 치매다 뭐다 얘기가 있다니 어찌된 영문인가 말이야. 신 회장 건강이 만약 정말로 예전 같지 않다면 부인인 시게미쓰 하쓰코(重光初子) 여사라도 나서야 하는 거 아닌가.”

―왜 이렇게까지 된 걸까요.

“사람의 본성에 관한 것인데…. (한숨을 내쉬며) 와카라네에(일본어로 ‘모르겠네’). 세상이 뭐라 해도 집안은 살아야 할 것 아닌가. 신 회장의 ‘아버지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고 봐. 부인도 틀림없이 그럴 거 아니야. 그렇다면 부모가 아들들을 불러 ‘넌 그만해. 너는 해’ 이렇게 정리해야 하지 않겠나.”

―롯데와의 첫 인연은 무엇이었나요.

“총리 그만두고 여러 해 흘렀는데 어느 날 밤 집으로 전화가 왔어. 받아 보니 ‘저 신격호입니다’ 하더라고. 그래서 ‘신격호가 누구요?’ 물었더니 ‘롯데…’ 이러더라고. 언제 식사를 같이하고 싶다면서. 시간이 없다고 전화를 끊었더니 3일 후 또 전화를 걸어서는 ‘롯데재단을 만들려고 하니 맡아 달라’더라고. 그래서 ‘정 필요하면 뒤에서 도와드리겠다’고 했어.”

―프러포즈 같습니다.

“내가 집사람이랑 하와이에 여행을 갔는데 그리로 또 신 회장이 전화를 한 거야. ‘내 큰아이(신동주 전 부회장)가 장가를 가는데 주례를 좀 서 달라’고. 거절했더니 남덕우 전 총리에게 부탁했더라고. 돌아와 신 회장과 점심을 먹은 게 첫 만남이었어.”

신동주 전 부회장은 1992년 고(故) 남덕우 전 총리의 주례로 재미교포 사업가 조덕만 씨의 차녀인 조은주 씨와 결혼했다. 세상에 거의 안 알려져 있지만 이 결혼은 신 전 부회장의 두 번째 결혼이었다. 그는 이에 앞서 일본인 여성과 결혼해 1남 1녀를 뒀으나 이혼했다.

―20여 년간 신 총괄회장이 후계 구도나 훗날 계획에 대해 말한 적이 없나요.

“신 회장은 본인이 백살까진 문제없게 산다고 생각했어. 신 회장은 항상 수첩에 깨알같이 적어. 나도 그런 신 회장이 오래 살겠지 했지. 신 회장이 구설수에 오르지 않고 나중에 떠나고, 아들들이 싸움질하지 않기를 내 마음이 간절히 원해.”

새해 1월 2일 아침 노 전 총리의 집을 방문해 다시 만났다. 부인과 함께 장미 90여 종을 키우던 장미 전문가였지만 부인이 2009년 세상을 뜬 후 장미 키우기를 관뒀다는 닷새 전 그의 말이 안타까웠다. 그래서 일본 작가 아사다 지로의 소설 ‘장미도둑’을 선물로 가져갔다.

반기문 대망론, 본인이 판단할 문제

―반기문 사무총장이 새해 인사를 해왔나요.

“그럼. 어제(신정) 오후 5시쯤 전화가 왔더라고. 곧 서울 온다기에 다시 만나자고 했지.”

―두 분 인연이 오래되셨지요.

“(외무부) 맨 밑에서부터 나랑 같이 일했어. 똑똑하고 하여튼 부지런해서 어느 나라든 갈 수 있었는데 첫 해외 부임지로 내가 대사였던 주 인도대사관에 지원해 왔지. 내가 총리 할 때도 따라오겠다고 해서 국무총리비서실 의전비서관으로 일했어.”

―신 총괄회장과 반 총장을 가까이에서 오래 봐 오셨습니다.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신격호는 비즈니스에 탁월한 재능을 가진 사람, 반기문은 유엔 사무총장에 맞는 사람.”

―유엔 사무총장에게 필요한 덕목은 무엇일까요.

“우선 상대방 얘기를 잘 듣고, 타협을 시키는 재주가 있어야지. 자기 고집 피우지 말고.”

―그건 대통령에게도 요구되는 덕목 아닐까요.

“약간 비슷하겠지. (웃음)”

―최근 정치권에서 ‘반기문 대망론’이 만만치 않은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자기가 판단해서 할 문제이지. 내가 옆에서 나오라고 할 문제도 아니고. 반 총장이 이제 70대잖아. 앞으로 한창 남은 인생을 행복하고 편안하게 마치면 좋겠어. 그걸로 내 답이 되지 않겠어?”

―장관, 안기부장, 총리…. 그동안 어떤 자리가 가장 마음에 드셨습니까.

“그때는 남북이 대결할 때였거든. 어떻게든 북한을 이겨야 흡수통일이 안 된다는 절박함이 있었어. 난 좋은 건 하나도 없어. 통일이나 돼야 좋지.”

평안남도가 고향인 그는 총리시절인 1985년 전두환 대통령에게 건의해 경기 파주 임진각에 망배단(望拜壇)을 만들었다. 명절이면 실향민들이 이곳에서 고향을 향해 절한다.

‘아웅산’때 항로 바꿔 대통령테러 면해

―1983년 아웅산 테러 때 안기부장이셨죠.

“당시 리처드 워커 주한 미대사, 중앙정보국(CIA) 한국지부장 두 사람과 상의했지. 그랬더니 원래 잡았던 순방 항로(航路)는 적성국(敵性國)인 중국에 너무 가깝다며 말레이시아 쪽으로 돌아서 올라가는 항로를 권하더라고. 전 대통령도 장세동 당시 대통령경호실장에게 의견을 묻더니 ‘잘 모르면 미국 사람이 하라는 대로 하라’고 했고. 그렇게 하니 당초보다 한 시간 반이 더 걸리는 바람에 도착했을 때엔 날이 어두워져서 공항에서 아웅산 묘소로 바로 못 가고 다음 날 오전에 참배해야 했지. 예정대로 갔으면 북한 공작원들의 테러가 그날 벌어져 대통령까지 위험하지 않았을까. 결국 다음 날 대통령이 도착하기 전에 묘소에서 기다리던 일행들이 테러를 당했지.”

―왜 당초 예정에 없던 미얀마에 갔습니까.

“그건 나도 궁금했지만 대통령에게 안 물어봤어.”

노 전 총리는 나와의 두 차례 만남에서 헤어질 때 각각 식당과 집 문 앞에까지 나와 ‘솔∼파∼’의 음정으로 “땡∼큐∼”라고 말했다. 평생 말을 아껴야 했기 때문일까. 그 음색이 왠지 ‘다 말해주지 못해 미안해’로 들렸다.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노신영#반기문#신격호#아웅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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