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에 만난 사람]“소파에서 즐기는 올림픽, 되게 어색하네요”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8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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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인기종목 선수 후원-마케팅 ‘장미란재단’ 장미란 이사장

꽃 옆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장미란 장미란재단 이사장. 그는 “꽃꽂이가 취미일 정도로 꽃을 좋아하지만 은퇴 후 한 번도 제대로 꽃을 꽂아 본 적이 없다”고 할 정도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장미란은 현재 재단 이사장 외에도 국제역도연맹(IWF) 선수위원, 용인대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꽃 옆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장미란 장미란재단 이사장. 그는 “꽃꽂이가 취미일 정도로 꽃을 좋아하지만 은퇴 후 한 번도 제대로 꽃을 꽂아 본 적이 없다”고 할 정도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장미란은 현재 재단 이사장 외에도 국제역도연맹(IWF) 선수위원, 용인대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내가 없는 올림픽을 보고 있으니까 왠지 어색하네요. 하하하.”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은메달,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 등 한국 여자역도의 꽃이었던 장미란(33). 16일 만난 장미란은 “올림픽을 선수가 아닌 관중으로 지켜보는 것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며 “후배들이 하는 경기를 집 소파에 누워서 보다가 ‘이렇게 올림픽을 편하게 봐도 되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고 웃으며 말했다. 2013년 은퇴한 장미란은 현재 자신이 만든 ‘장미란재단’을 통해 비인기종목 선수들을 후원하거나 유소년 선수들을 지원하는 공익 활동을 하고 있다.

“저 자리에 서 있는 것만도 대단한 거죠”

‘찾아가는 멘토링 교실’을 진행하고 있는 장미란 이사장이 서울의 한 중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운동과 학업의 균형을 맞출 수 있는 방법을 조언해 주고 있다.
‘찾아가는 멘토링 교실’을 진행하고 있는 장미란 이사장이 서울의 한 중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운동과 학업의 균형을 맞출 수 있는 방법을 조언해 주고 있다.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은 장미란이 12년 만에 처음으로 주인공이 아닌 관중으로 지켜보는 올림픽이다. 그는 “선수 때보다 지금이 더 바쁘다”고 말했지만 올림픽만큼은 재방송이라도 꼭 챙겨 본다고 한다.

“(선수가 아닌) 응원하는 위치에서 경기를 보니까 올림픽 메달을 딴다는 게 더 어려운 것 같아요. 한순간도 쉬운 게 없어 보여요.”

장미란은 “선수로 뛸 때는 배구 축구 등 구기 종목을 잘 보지 못했는데 이번에 경기를 보면서 구기 종목 후배들을 더 대단하게 보게 됐다”며 “역도는 그룹별 예선 경기를 뛰고 순위 안에 들면 바로 결승인데, 구기 종목은 메달을 따기 위해 32강, 16강, 8강 등 몇 번씩 경기를 치르지 않느냐. 메달이 문제가 아니라 그 자리에 서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하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다른 종목의 금메달 소식도 기뻤지만 그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 함께 출전했던 윤진희의 동메달 획득 소식을 들었을 때 누구보다 기뻐했다고 한다. 그는 “오히려 선수로 뛸 때보다 지금처럼 옆에서 보는 게 더 힘들다”며 “역도가 메달 획득이 어렵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그런 가운데 진희가 동메달을 따내니 더 반가웠다. 은퇴했다가 복귀해서 올림픽에 나가는 것만 해도 쉽지 않았을 텐데 정말 잘됐다”고 말했다.

“제 칭찬과 격려가 힘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장미란이 자신의 이름을 건 재단 활동 중 많은 애착을 갖고 있는 프로그램은 소외계층 청소년과 함께 체육활동을 하는 ‘장미 운동회’다. 장미란은 “행사를 할 때마다 함께 운동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열고 소통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신기하다”고 말했다. 장미란재단 제공
장미란이 자신의 이름을 건 재단 활동 중 많은 애착을 갖고 있는 프로그램은 소외계층 청소년과 함께 체육활동을 하는 ‘장미 운동회’다. 장미란은 “행사를 할 때마다 함께 운동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열고 소통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신기하다”고 말했다. 장미란재단 제공
“다시 올림픽에 출전하고 싶은 생각이 없느냐”는 질문에 장미란은 “아유∼ 전혀요∼”라고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지금은 지금 할 일이 있다는 것. 장미란은 2012년 자신이 설립한 장미란재단의 이사장이다. 재단에서는 어린 비인기종목 선수 후원, 전·현직 국가대표 선수 멘토링, 탈북 청소년이나 학교폭력 피해 학생들과 함께하는 체육 활동 등 공익 활동을 하고 있다.

그가 비인기종목 선수들을 위한 후원과 멘토링 활동을 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팬들에게 받은 과분한 사랑 때문이다.

“여자 역도는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처음 정식 종목이 됐어요. 그때까지 역도 선배들은 조명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참 서러웠어요. 하지만 저는 그렇지 않고 오히려 과분한 사랑을 받았죠. 2012년 런던 올림픽 때는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을 냈는데도 국민들이 정말 많은 박수를 보내주셨잖아요.”

장미란이 자신이 받는 인기를 피부로 실감한 때는 금메달을 딴 베이징 올림픽 다음 해인 2009년이었다고 한다. 경기 고양시에서 역도 세계선수권 대회가 열렸을 때다. 비인기 종목의 특성상 올림픽이 아니면 크게 주목받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경기장 밖에까지 줄이 길게 늘어설 정도로 관중이 몰렸던 것. 그 장면을 보고 입이 떡 벌어졌다고 한다.

“경기장에 못 들어온 사람이 꽤 많다고 하더라고요. 저희 아버지도 못 들어오실 뻔했죠. 경기장엔 일찍 도착했는데 손님 모시러 밖에 나갔다가 못 들어오실 뻔했다더라고요. 하하.”

장미란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300일이 힘들어도 60일이 기쁘면 아무리 힘든 훈련도 받을 수 있었다고 말하곤 했는데 그게 다 많은 분들이 격려하고 칭찬하고 응원해 주신 덕분이었다”며 “비인기 종목에서 땀을 흘리는 어린 선수들에게도 그런 응원과 칭찬을 제가 해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장미란재단은 그가 은퇴하기 전해인 2012년에 만들어졌다. 아버지 장호철 씨의 권유가 큰 힘이 됐다. 재단 설립은 나이가 더 들면 할 일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는데 아버지가 등을 떠민 것. 아버지는 “조금이라도 더 주목받고 있을 때 재단을 세워야 더 많은 사람들의 도움도 받을 수 있고, 더 많은 도움도 줄 수 있다”고 장미란을 설득했다.

그는 “거창한 청사진을 그리는 것보다 오늘 하고 있는 일을 10년 후에도 계속 해 나가고, 가능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볼 수 있도록 재단을 잘 꾸려 나가고 싶다”며 “순간순간 열심히 사는 게 내가 제일 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스포츠 외교? 한 걸음부터요”

강원 원주의 한 복지단체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장미란 이사장. 장미란재단에서 소외계층에 대한 봉사는 빼놓을 수 없는 활동이다
강원 원주의 한 복지단체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장미란 이사장. 장미란재단에서 소외계층에 대한 봉사는 빼놓을 수 없는 활동이다
결국 안 됐지만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선수위원에 도전했던 것도 재단 설립과 비슷한 이유에서다.

지금도 국제역도연맹(IWF) 선수위원으로 있는 장미란은 역도 개발도상국의 주니어 대회를 주로 찾는다. 어린 선수들에게 롤 모델이자 인기 스타인 장미란은 가는 곳마다 셀카를 찍자는 요청을 수도 없이 받는다고 했다. 그들에게 말 한마디, 동작 하나 가르쳐 줄 때마다 눈빛을 반짝이며 집중하는 어린 선수들을 보고 더 많은 나라에 도움을 주고 싶어서 IOC 위원에 도전했었다고 했다. 그는 또 “IOC 위원이 돼서 운동선수들의 좁은 시야를 좀 넓혀 주고, 분별력도 길러 줄 수 있는 활동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리우 올림픽에서 유난히 금지약물이 문제가 되고 있는 이유도 이런 점이 부족해서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선수들은 어릴 때부터 하루 대부분을 운동만 하면서 성적에 대한 압박을 심하게 받죠. 아직 분별력이 올바로 서지 않은 상태에서 지나친 성과를 요구받다 보면 옳지 않은 것에 손을 대는 일도 벌어집니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해 주고 싶었어요.”

“IOC 선수위원에 다시 도전할 생각은 없느냐”고 묻자 장미란은 “꼭 IOC 위원을 해야 할 수 있는 일들은 아니더라”며 웃었다.

한국은 리우 올림픽을 사실상 IOC 위원 없이 치르고 있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와병 중이고, 문대성 선수위원은 논문 표절 여파로 직무 정지 중이다. IOC 위원이 있느냐 없느냐는 한 나라의 스포츠 외교력을 평가하는 기본 척도가 되기도 한다. 당장 리우 올림픽만 해도 레슬링에 출전한 김현우 선수가 심판진의 석연찮은 판정에 패자부활전으로 밀려났지만 엄중한 항의는 하기 힘들었고, 감독은 관중석으로 쫓겨났다.

장미란은 “지금 당장 IOC 위원이 생긴다고 그런 문제가 해결되진 않을 것 같다”며 “주변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찾아서 해 나가려 한다”고 말했다.

꽃·책·혼자 있는 시간

인터뷰 내내 장미란은 한 번도 말이 막힌 적이 없다. 말투는 단정했지만 하고 싶은 말은 확실하게 했다. “책을 많이 읽은 탓이냐”고 물으니 “저한테는 쉬는 것”이라고 답했다.

“선수 때부터 저한테는 휴식이란 게 여행을 가거나 기분전환을 하러 가는 게 아니라 방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어요. 그러면서 음악도 듣고 영화도 보고 책도 봤죠. 책을 많이 보는 건 아닌데, 마음에 드는 좋은 책이 있으면 수도 없이 읽는 습관이 있어요.”

그는 이해인 수녀의 시집과 이지선 씨의 ‘지선아 사랑해’ 등 ‘일상에 감사함을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지선아 사랑해’는 교통사고로 큰 화상을 입은 이지선 씨가 장애를 극복하고 살아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책을 읽지 않는 시간에는 꽃꽂이를 했다고 한다.

“선수 때 쉬는 날이 있으면 꽃을 꽂았죠. 예쁘게 장식해 놓고 나면 기분이 그렇게 좋더라고요. 지금은 재단 이사장, 대학 교수, IWF 선수위원까지 명함이 세 개나 될 정도로 바빠서 언제 꽃꽂이를 했는지 잘 생각도 나지 않네요. 하하하.”

대단하고 거창한 포부가 있을 것 같은 그. 하지만 그의 답은 “그저 열심히 살고 싶다”는 것이었다.

“저는 별로 잘하는 게 없으니까요, 그저 열심히 살고 싶어요.”

“열심히 사는 게 어떻게 사는 것이냐”는 질문에 그는 “똑같은 실수를 다시 하지 않으려고 애쓰고, 나중에 돌아봤을 때 후회를 덜 남길 수 있게 사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이 두 가지 원칙을 지키려고 노력해 왔던 것 같아요. 큰 꿈이 아니어도 작은 꿈을 꾸고 그걸 이뤄내다 보면 중요한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충남 천안지역 청소년들과 장미운동회 중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장미란 이사장. 장 이사장은 “청소년들과 함께 운동을 하면 웃을 일이 많이 생긴다”고 말했다. 장미란재단 제공
충남 천안지역 청소년들과 장미운동회 중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장미란 이사장. 장 이사장은 “청소년들과 함께 운동을 하면 웃을 일이 많이 생긴다”고 말했다. 장미란재단 제공
장미란은 2004년 아테네, 2008년 베이징에 이어 2012년 런던 올림픽 메달리스트에 이름을 올릴 수 있게 됐다. 런던에서 4위로 메달을 못 땄지만 최근 IWF의 도핑 재검사 결과 런던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땄던 흐리프시메 쿠르슈[(아르메니아)이 금지약물을 사용한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현재 IOC는 쿠르슈[의 동메달을 회수해 장미란에게 수여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

이에 대해 장미란은 “아직 결정된 것이 하나도 없다”며 “지금은 리우 올림픽이 한창 열리고 있고, 제 메달 소식보다는 땀 흘린 후배들이 더 주목받아야 할 때”라고 말했다.

이원주 기자 takeoff@donga.com
#장미란#장미란 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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