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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있게한 그 사람]김수림 크레디트스위스 도쿄지사 법무심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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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있게한 그 사람]김수림 크레디트스위스 도쿄지사 법무심사관

동아일보입력 2012-07-19 03:00수정 2012-07-19 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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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언어 능통한 청각장애 커리어우먼…그녀가 있어 가능
전화를 치워달라고 했다. 사무실을 옮기고 나서다. 나는 전화 통화를 할 수 없다. 소리를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금융회사 크레디트스위스 도쿄지사에서 법무심사관으로 일한 지 6년째다. 이에 앞서 4년 동안 골드만삭스에서, 그 전에는 일본 1위의 제지회사 오지(王子)제지에서 근무했다. 새 책상에 놓인 전화를 볼 때마다 나는 전화가 필요 없다고 말했다. 불편 없이 일한다면 거짓말이다. 서류작업을 주로 하지만 어쩌다 나를 잘 모르는 사람에게서 급한 업무용 전화 연락이 올 때도 있다. 회의할 때는 여러 사람의 입 모양을 한꺼번에 확인하기 어렵다. 그럴 때면 동료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나는 날마다 역량을 한껏 발휘하며 신나게 일한다고 자부한다. 나는 한국어, 일본어, 영어, 스페인어로 이야기할 수 있다. 글로벌기업에서 일하는 데 큰 바탕이 된 능력이다.

여섯 살 때부터 귀가 들리지 않았다. 상대의 입술을 읽고 말하는 법을 익혀야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엄마와 함께 일본에서 살게 되면서 일본어를 배웠다. 나를 ‘바보’라고 놀리는 아이들에게, 그 뜻이 무엇인지 몰라도 입술을 똑같이 ‘바보’라고 만들어 소리쳐 답해줬다. 나의 ‘일본어 완전 정복’은 낯선 나라에서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절박함 덕분에 가능했다. 그 절박함이 또한 영어에 도전하게 했다. 장애를 가진 사람이 혼자 힘으로 살아가기 위한 무기가 무얼까 고민하다 닿은 결론이었다.

린다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커리어우먼 김수림은 없었을 것이다. 고교를 졸업하고 영국으로 어학연수를 떠났을 때 내 영어실력은 ABC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귀가 들리지 않으니 그룹 수업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다. 그런 나를 보고 어학원 교장선생님이 린다 선생님을 나의 과외교사로 불렀다. 유치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 은퇴한 분이었다. 알파벳을 가르칠 때 선생님은 내 손을 끌어당겨 선생님의 입술 움직임, 목의 진동을 일일이 만져보고 확인시키셨다. 혀의 움직임과 이의 맞물림을 알게 하기 위해 입 속에 손을 넣어보게도 하셨다. 수업이 끝나면 선생님 화장이 덕지덕지 지저분하게 지워져 있을 정도였다. 영어 발음이 조금씩 몸에 익숙해져 가는 과정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공부의 즐거움을 알게 된 순간이기도 했다. 6개월 뒤 나는 영어로 대화할 수 있는 수준이 됐다. 린다 선생님의 끈기와 헌신을 생각하면 감사한 마음이다. 일본으로 돌아와 대학을 졸업한 뒤 오지제지에 입사했을 때 회사가 관심을 보였던 부분도 나의 영어 실력이었다. 이후 유럽여행을 떠났을 때 스페인에 푹 빠진 것을 계기로 스페인어를 배우면서 내가 구사할 수 있는 언어는 하나 더 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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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골드만삭스로 회사를 옮기고 남편 야스타케와 만나게 됐다. 인터넷 만남 사이트를 통해서다(솔직히 좀 이상한 만남이라는 생각은 든다). 까다로워 보이는 첫인상과 달리 사귀다 보니 진국이라는 걸 알게 됐고 결혼을 결심했다. 멋진 커리어우먼으로, 성실한 아내로 살고 싶었지만 결혼한 뒤 어느 것 하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나를 아껴줬던 상사가 회사를 떠난 뒤 외따로 떨어진 심정에, 새로운 부서에서 일하면서 새삼 나의 장애를 실감하고 힘겨워 했다. 매일 집에 와선 남편에게 소리를 질렀다. 장애를 가진 나와 왜 결혼한 것이냐고, 골드만삭스라는 회사 이름 때문이었냐고. 이런 나를 남편은 묵묵하게 견뎌주면서 상냥하게 격려했다. 어느 날 화를 퍼붓는 내 앞에서 남편은 조용히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남편이 아닌, 나를 위해서 흘리는 눈물이었다. 그때 깨달음이 벼락처럼 왔다. “이렇게 나를 생각해 주는 사람을 더이상 슬프게 해서는 안 된다.” 고통에 빠졌던 나를 일으켜 세운 것은 남편의 깊은 사랑이었다.

마지막으로 엄마가 있다. 내가 두 살 때 아빠와 이혼하고 돈 벌겠다고 일본으로 떠난 엄마. 악착같이 돈을 모아 다시 나를 데려간 엄마. 장애를 가진 딸을 홀로 키운 엄마. 엄마를 잘 이해하지 못해 싸우기도 많이 싸웠지만, 지금 생각하니 엄마는 사회를 향해 엄청난 에너지를 발산한 것이었다. 그 적극적이고도 열정적인 엄마의 뒷모습 또한 오늘의 나를 있게 했다. 그런 엄마에게 늘 감사드린다.

김수림 크레디트스위스 도쿄지사 법무심사관
정리=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청각장애 커리어우먼#김수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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