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치지 않는 자의 골프 이야기]<6>스크린골프와 가상현실(VR)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9월 7일 13시 4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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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벌써 가버렸나 / 거리엔 어느새 서늘한 바람~.’

컴백 공연을 앞두고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고(故) 조동진 선생의 명곡 ‘나뭇잎 사이로’의 한 구절이 생각나는 계절이다. 뜨거운 여름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았는데 어느덧 꽤 선선해졌다.

‘포크음악의 대부’ 故조동진.
‘포크음악의 대부’ 故조동진.

최근 필자가 몸담고 있는 하바스코리아와 전략 자문을 해주고 있는 ‘대학 내일’의 2030 젊은 직원들에게 “지난 여름을 생각하면 가장 떠오르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봤다. 상당수가 이렇게 말했다. “서핑(Surfing)!”


올해 G마켓의 서핑보드 매출은 작년보다 480% 늘었다. 같은 기간 서핑보드 의류 판매도 181% 증가했다. 이마트에서도 7, 8월 2달 간 2000개 이상의 서핑보드가 판매됐다. 대한서핑협회도 지난해 4만 명이었던 서핑보드 인구가 올해 5만 명 이상으로 늘어난 것으로 추산했다.

서핑을 즐긴다는 친구들에게 “왜 서핑을 좋아하느냐”는 질문에 대답은 비슷했다. ‘힙(hip)하다’ ‘주류와 다른 변방 문화를 대표한다’는 거였다. 그 중 가장 인상적인 답변은 이랬다. “우리는 컴퓨터 스크린만 보고 노는 친구들과 달라요. 서핑은 진짜 몸으로 부딪히며 즐기는 스포츠니까요.”

이처럼 스포츠의 묘미는 야외에서 땀을 흘리며 인간 신체의 한계를 시험하는 것이다. 반면 ‘스크린 골프’는 다르다. 초기의 스크린 골프는 ‘골프를 좋아하지만 실제 골프장에 나가기에 시간이 부족한 전문가 집단의 세련되고 합리적 대안’으로 각광받았다.

그러나 스크린 골프장이 급증하고 각 업체간 경쟁이 심해지면서 골프와 상관이 없는 서비스가 덧붙여졌다. 대표적 예가 여성 도우미다. 젊고 아름다운 여성 도우미가 스크린 골프 준비를 도와주고 맥주나 음료 서빙을 해주기 시작하면서 술집과의 경계가 모호해지기 시작했다.

스크린 골프장이 스포츠 애호가들의 시간 부족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룸살롱보다 싼 가격에 말초적 서비스를 기대할 수 있는 곳으로 바뀌어버렸다. 물론 스크린 골프장에서 일탈 행위를 하는 이는 극히 일부지만 전반적인 이미지 하락은 불가피했다. “스크린 골프장에 간다”고 하면 묘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꽤 생겼다는 뜻이다.

점잖은 사람도 예비군 군복만 입혀놓으면 사람이 바뀐다는 말이 있다. 노상 방뇨를 서슴지 않고 동전 던지기와 같은 유치한 사행성 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평소 자신을 얽어매던 현실에서 벗어나 익명이 보장되는 가상 세계에 진입하면 현실에서 할 수 없었던 일탈 행동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다고 느끼는 게 인간의 본능일까. 이 일탈 행위가 집단행동으로 번지면 더욱 걷잡을 수 없어진다.

2007~2008년 세계적 인기를 끈 가상현실 게임 ‘세컨드 라이프’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다. 이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이 건설적이지 않은 방향으로 자신의 욕구를 발산하면서 각국에서 사회 문제로 대두했다. 한국에서도 세컨드 라이프 안 가상 화폐인 ‘린든달러’를 산 후 아이템을 매매해서 달러로 받는 ‘불법 환치기’가 성행했다.


이런 일이 일어나자 초기에 스크린 골프를 즐겼던 애호가들은 이제 직접 몸을 움직이는 현실 세계로 되돌아왔다. 주변에서도 스크린 골프를 끊고 다시 골프장에 열심히 나가거나 철인3종, 서바이벌게임, 오지여행, 익스트림 스포츠, 목공예 등 손과 몸을 움직이는 취미에 빠진 중장년층이 적지 않다. 일부는 취미를 넘어 전문가 수준에 이르기도 한다.

필자의 지인이자 모 대기업 임원인 A 씨. 일에 관해서라면 누구 못지않게 철저하고 집요한 성미로 ‘독사’라는 별명까지 있다. 어느 날 그가 또래들의 모임에서 “주말 아침 골프장에 나가면 처음에는 지난 밤 마신 술의 숙취 때문에 힘들어서 툴툴대요. 그러다 잔디에 맺힌 이슬들과 그 방울방울에 비치는 영롱한 햇빛을 보면 ‘이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나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하고 느끼곤 합니다.”라고 말했다.

A 씨의 평소 모습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감성적 비유였다. 이 말을 듣고 그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B 씨가 자세를 고쳐 잡으며 건배를 제안했다. “당신에게 이런 면이 있는지 몰랐네. 나도 골프를 좋아하지만 풀잎에 맺힌 이슬에 눈길 한 번 준 적 없는데 반성하고 싶네. 매사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겠어.”

덩달아 골프를 치지 않는 필자도 크게 소리치며 화답했다. “나이스 샷!”

일에 관해서라면 맹수처럼 으르렁대던 두 사람이 살갑게 대화를 나누게 만드는 실제 골프의 묘미를 만끽할 계절이다. 스크린 골프도 건전하게 즐기고 이슬을 밟으며 실제 필드에 나가 땀도 흘리시라. 그러면서 ‘나뭇잎 사이로’의 가사 한 줄 흥얼거려도 좋겠다.

“어느새 정다운 불빛 / 그 빛은 언제나 눈 앞에 있는데”

박재항 하바스코리아 전략부문 대표 parkjaehang@gmail.com
:: 필자는? ::

제일기획 브랜드마케팅연구소장, 이노션 마케팅본부장, 현대차그룹 글로벌경영연구소 미래연구실장, 기아차 마케팅전략실장 등을 역임한 브랜드·커뮤니케이션 전문가다. 현재 프랑스계 다국적 마케팅기업 하바스코리아의 전략부문 대표를 역임하고 있다. 저서로 ‘모든 것은 브랜드로 통한다’ ‘브랜드마인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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