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일담] 프로야구 첫 영구결번, 어떤 슬픈 이야기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7월 10일 11시 2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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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7월 8일 새벽 3시 반경.

당시 프로야구 OB(현 두산) 지휘봉을 잡고 있던 김성근 감독은 대구 방문 일정 도중 ‘투수 박상열이 물에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됩니다.




박상열은 1984년 12승(7패)을 따낸 팀의 주축 투수였지만 이해에는 시즌 중반까지 3승(3패)에 머물고 있던 상태. 때마침 아들을 얻기도 한 박상열은 득남도 자축할 겸 울적한 기분도 해소할 겸 동료들과 어울려 새벽까지 수성못 인근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셨습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박상열은 그해 신인 김영신에게 수성못 안에 있는 바위까지 누가 헤엄 쳐서 먼저 갔다 오는지 내기를 하자고 제안합니다. 수영을 잘 못하던 김영신이 머뭇거리자 박상열은 “내가 해병대 출신이다. 물에 빠지면 건져 주겠다”고 큰소리쳤습니다. 결국 둘은 팬티까지 모두 벗고 물속으로 뛰어 들어갔죠.

그런데 김영신이 한참 헤엄을 치다 포기하고 돌아와보니 박상열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옷은 벗어둔 자리에 그대로 있던 상태. 김영신은 애타게 “상열이 형! 상열이 형!”하고 불렀지만 메아리조차 없었습니다.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자 김영신은 구단 프런트 직원에게 연락했습니다. 이때가 새벽 2시경. 그 뒤 프런트 직원들까지 동원해 1시간 반 동안 수성못 근처를 뒤졌지만 끝애 박상열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김 감독에게까지 보고를 했던 것.

김 감독은 숙소에 있던 선수들을 모두 깨워 ‘유명을 달리한’ 박상열의 시신을 한 시간 넘게 애타게 찾았습니다. 먼동이 터오던 새벽 4시 40분경 누군가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찾았다!” 박상열을 찾은 곳은 수성못이 아니라 숙소였습니다. 술에 취한 박상열이 자기 방이 아니라 다른 선수 침대 밑에 발가 벗은 채 시체처럼 곯아떨어져 있었던 것.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김 감독은 박상열에게 “곧바로 짐을 사서 2군으로 내려가라”고 소리쳤습니다.

이상은 고 이종남 야구 전문기자가 펴낸 책 ‘사람 좋으면 꼴찌’에 들어 있는 내용을 정리한 것. 그래도 김 감독 눈에 박상열이 아주 내칠 만큼 싫지는 않았는지 둘은 지난해까지 한화에서 한솥밥을 먹기도 했습니다.

‘수성못 익사 사건’은 결국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이듬해 김영신이 정말 물에 빠졌을 때는 박상열이 그를 구해주지 못했습니다. 1986년 8월 16일자 동아일보는 “OB 베어스 소속 김영신 선수(당시 26)가 익사체로 떠내려오는 것을 육군 초병이 발견, 인양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이 기사는 계속해 “경찰은 사체 검안 결과 김 선수가 14일 오후 4시경 익사했으며 더위를 피해 혼자 한강에 나갔다가 급류에 휘말려 변을 당한 것으로 추정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단, 이 기자는 같은 책에서 “김영신이 (성적 비관을 이유로) 한강에 스스로 몸을 던졌다”고 썼습니다.




김영신은 1984년 로스앤젤레스(LA) 올림픽 국가대표로 뽑히는 등 유망주로 손꼽히던 포수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OB는 ‘포수 사관학교’라고 불릴 만큼 좋은 포수가 많았습니다. 김경문(59·현 NC 감독), 조범현(57·전 kt 감독) 등 당대를 대표하는 포수들이 주전 경쟁을 벌이는 통에 김영신을 출전 기회를 얻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김영신은 2년간 22경기에 나서 타율 0.156에 2타점을 기록한 게 전부였습니다.

OB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의미에서 등번호 54번을 영구결번 처리했습니다. 이는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첫 번째 영구 결번 사례입니다. 동아일보 기사에서 ‘영구결번’이라는 표현을 쓴 것도 김영신이 처음이었습니다.

LG에서 9일 이병규(43)가 썼던 등번호 9번을 영구결번으로 만들면서 이제 프로야구에 영구 결번은 총 13개가 됐습니다. 영구결번은 역사에 영원히 남을 만큼 대단한 활약을 펼친 선수에게 팀이 선물하는 최고의 영예. 그래서 나머지 영구결번 열 두 번 모두 기쁨과 훨씬 더 가깝지만 첫 번째만은 유독 슬픔과 맞닿아 있습니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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