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성 전문기자의 &joy]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경주 500년 양반촌을 어슬렁거리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4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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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와집 초가집 ‘어깨동무 꽃물결’… 양동에 봄처녀 오셨네

봄빛 가득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경주 양동마을. 고묵은 회화나무, 느티나무 우듬지마다 우우우 연둣빛 새싹이 올라오고, 안마당 매화꽃은 은은한 향으로 코끝을 간질인다. 모과빛 초가지붕들이 하나같이 볕바르다. 조붓한 고샅길 울타리엔 노란 개나리가 머리카락을 치렁치렁 늘어뜨리고 있다. 잿빛 기와집 오래뜰엔 늙은 향나무가 헌걸차게 서 있다. 새뜻한 초가집과 곱게 늙은 고택이 어깨동무로 살갑게 어우러졌다. 발밤발밤 어슬렁거리다 보면 그 옛날 ‘나의 살던 고향’에 온 것 같다. 경주=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봄빛 가득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경주 양동마을. 고묵은 회화나무, 느티나무 우듬지마다 우우우 연둣빛 새싹이 올라오고, 안마당 매화꽃은 은은한 향으로 코끝을 간질인다. 모과빛 초가지붕들이 하나같이 볕바르다. 조붓한 고샅길 울타리엔 노란 개나리가 머리카락을 치렁치렁 늘어뜨리고 있다. 잿빛 기와집 오래뜰엔 늙은 향나무가 헌걸차게 서 있다. 새뜻한 초가집과 곱게 늙은 고택이 어깨동무로 살갑게 어우러졌다. 발밤발밤 어슬렁거리다 보면 그 옛날 ‘나의 살던 고향’에 온 것 같다. 경주=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나랏님도 살지 못하는 국가 보물에 살고 있으니
전생의 무슨 복을 지었는지

너른 뜰에 자연이 빚은 조화로움
무첨당 파련대공과 맞장을 두는 봄날
비탈진 언덕에 금방이라도 곤두박질칠 것 같은
봉두 밥사발이 일렁인다
은근한 한약향내 퉁벌이 먼저 시식하는 작약밭
수줍은 털 고깔 눌러 쓴 해당화 열매
덤불 위에 얌전히 올라앉아
먼데 바닷바람 그리고
감나무 아래를 통으로 깔고 앉은 봄 구절초
……

알록달록 차려 입은 상춘객의 환호성
“어머머, 옛날 우리 클 때 보던 것들이네”
마당 구석구석 들리는 찰칵찰칵 소리에
못내 흐뭇한 무첨당
세월에 묻혀 오백년을 그렇게

(신순임의 ‘무첨당의 5월’에서)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 신라 흥덕왕릉 주변 소나무 숲.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 신라 흥덕왕릉 주변 소나무 숲.
경주 동북쪽 양동마을은 조선 500년 양반촌이다. 동네는 항아리처럼 입구가 좁고, 뒤로 갈수록 넓게 트였다. 모과 빛깔의 초가집(110여 채)과 잿빛 기와지붕들(50여 채)이 살갑게 어우러졌다. 봄빛을 잔뜩 머금어 바야흐로 한 폭의 그림이다.

새뜻한 초가집들이 올망졸망 꼬마부채처럼 서 있다. 하나같이 볕바르다. 대부분 산 아래쪽에 버섯처럼 오종종 몰려 있다. 기와집들은 동산이나 높은 마루에 자리 잡았다. 하지만 위압적이지 않고 친근하다. ‘ㅁ’자나 ‘ㄷ’자 엎어놓은 것처럼 살짝 웅크렸다. 목을 파묻고 자는 ‘검댕 묻은 부엌강아지’ 같다. 2010년 7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마을 뒷산은 설창산이다. 설창산이 ‘勿(물)’자 모양으로 손 갈퀴를 뻗어 내렸다. 마을 앞쪽 안산인 성주산에 올라가면 한눈에 볼 수 있다. 재물과 인재가 모여드는 지세다. 조선시대 이 마을에서 나온 과거 급제자가 모두 116명이나 된다. 그 손가락 사이마다 낮은 지붕의 초가집들이 숨어 있다. 손가락 마디 도드라진 곳엔 어김없이 수백 년 늙은 기와집들이 똬리를 틀고 있다.

이 중에서도 서백당(書百堂)이 으뜸이다. 월성 손씨 큰 종갓집이다. 이 마을에 맨 먼저 들어와 터를 잡은 손소(孫昭·1433∼1484)가 1459년에 지은 집이다. 집터는 ‘勿’자의 혈맥이 맺혀 있는 천하명당. 현자(賢者) 3명이 태어난다는 길지다. 청백리로 이름난 손소의 아들 손중돈(1463∼1529)과 손소의 외손자 이언적 선생(1491∼1553)이 이곳에서 태어났다. 현자 1명은 아직 기다리는 참이란다.

양동마을은 월성 손씨와 그의 외손 이언적 자손 여강 이씨가 500년 넘게 살아온 양반 집성촌이다. 같은 기와집이라도 손씨 종가 서백당과 이씨 종가 무첨당(無첨堂)이 능선 높은 곳에 있다. 종가 아닌 후손들 집은 그보다 낮은 곳에 종가 쪽을 올려다보는 형태로 지어졌다. 서백당은 ‘하루에 백 번 참을 인(忍)자를 쓴다’는 뜻이고 무첨당은 ‘자신을 욕되게 하지 말라’는 의미다.

두 집안은 선의의 경쟁과 협조로 양동마을을 발전시켰다. 초반엔 손씨가 번성했고 중후반엔 이씨가 뻗어나간 것으로 보인다. 남아 있는 마을의 정자나 집을 보면 알 수 있다. 손씨 관련 정자나 고택은 서백당(1459년), 관가정(1504년), 낙선당(1540년), 수운정(1582년), 안락정(1780년), 정충비각(1783년) 6곳이다.

이씨 관련은 무첨당(1508년), 향단(1540년), 영귀정(1544년), 심수정(1560년), 육위정(1591년), 설천정사(1602년), 수졸당(1616년), 이향정(1695년), 상춘헌(1730년), 대성헌(1732년), 두곡고택(1733년), 양졸정(1734년), 근암고택(1780년), 경산서당(1835년), 영당(1836년), 사호당고택(1840년), 동호정(1844년), 창은정사(1860년), 강학당(1867년), 내곡정(1914년) 등 무려 20곳에 이른다.

양동마을은 발밤발밤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 수백 년 된 서백당과 관가정 향나무, 늙은 회화나무와 느티나무, 여기저기 활짝 피어난 산수유 꽃과 목련꽃, 서쪽으로 확 트인 안강 벌판, 마을 가운데 물봉동산과 안골동산…. 고샅길 숨바꼭질하듯 노량으로 다니다 보면 하루해가 훌쩍 넘어간다.

■ Travel Info


교통 ▽비행기=서울 김포공항∼울산공항(울산∼경주 52km 시외버스), 서울 김포공항∼포항공항(포항∼경주 19km 시외버스) ▽기차=KTX 서울역∼신경주역, 새마을 무궁화호 서울역∼경주역(역에서 버스나 택시로 이동. 버스 7분 간격 40분 소요) ▽고속버스=서울 강남고속터미널∼경주(4시간 30분) ▽승용차=서울∼중앙고속도로 금호분기점∼경부고속도로 도동분기점∼대구-포항간고속도로 포항나들목∼국도 28호선 강동 방면∼양동마을(입구에서 마을까지 1.2km 도보)

먹을거리
▽양동마을 옥산서원 주변=달성거랑(추어탕 닭도리탕·054-762-0380·사진), 청정(한정식·054-762-6151), 느티나무식당(양푼이찰보리밥·054-761-7675), 양동마을초원식당(연잎밥·054-762-4436), 양동마을우향다옥(청국장 된장찌개·054-762-8096) ▽보문단지 입구 북군동 식당동네=전주비빔밥(삼합 홍탁·054-745-0279), 맷돌순두부(054-745-2791), 정화식당(순두부 우거짓국·054-745-2313), 흥부네(순두부·054-748-5688) ▽경주역 부근 해장국거리=팔우정해장국(054-742-6515), 할매해장국(054-743-1984)

♣양동마을회관 054-762-2630 ♣양동마을 매표소 054-762-6263 ♣양동마을 문화관 054-779-6127 ♣경주시청 문화관광과 054-779-6078
▼ 아내는 무첨당 사계 읊고, 남편은 성리학 공부 ▼

종부(宗婦) 시인 신순임 씨 내외


신순임 씨(47)는 양동마을 여강 이씨 종갓집 며느리, 즉 종손 부인이다. 그는 시를 쓴다. ‘종부(宗婦) 시인’인 셈이다. ‘무첨당의 5월’(2011년) ‘앵두세배’(2013년) 등 두 권의 시집을 냈다. ‘무첨당의 5월’은 여강 이씨 종부로서 양동마을 무첨당의 삶을 서정적으로 그려냈다.

무첨당(無첨堂)은 회재 이언적 선생(晦齋 李彦迪·1491∼1553)의 500년 고택. 종손 부인으로서 ‘무시로 저벅저벅 걸어오는 무첨당의 사계(四季)를 그대로 옮겨 놓았을 뿐’이라며 겸손해한다. 낮고 그윽한 목소리로 ‘16세기에 지어진 고택에서 21세기를 노래’한 것이다.

‘종부요/술 안 새는 술 좀 주소/순간 헷갈린다/처음 뵙는 제관이시라/멀뚱거리니/종손 삼촌이/술 가득 담아 달라카디더 한다’(‘음복’ 중에서)

‘앵두세배’는 신씨의 친정 청송(靑松) ‘중들마을’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았다. 그는 자신을 키운 고향 ‘푸른 솔’ 청송을 노래하고, 친정 부모의 늙어가는 모습을 애잔하게 바라본다. 친정 동네는 평산 신씨(平山 申氏)의 수백 년 세거지. 그 역시 신씨 종갓집 작은딸로 태어난 것이다.

‘앵두가 빨갛게 익어야만 갈 수 있는 친정나들이/꿈같이 나설 걸음 아득하고/어버이 안전에 내놓을 앵두는/가슴에서 익는다//물러 익은 생채기에 단 눈물이 흐르고’(‘앵두세배’ 중에서)

앵두세배란 시집간 딸이 정월 세객 맞느라 너무 바빠, 앵두가 익을 무렵에야 그 익은 앵두를 따서 친정으로 세배를 가는 것을 말한다.

종손이자 그의 바깥양반 이지락 씨(45)는 “시집 ‘앵두세배’ 때문에 나만 욕먹게 생겼습니다. 사람들이 나더러 부인 친정도 제때 안 보내준다고 할 것 아닙니까”라며 허허 웃는다. 이 씨는 한문학 박사다. 한국국학진흥원 객원연구원으로 일하며 틈틈이 대학 강의도 나가고 있다.

“혼인이란 문화와 문화의 결합이라고 생각합니다. 종가는 한마디로 농경문화라고 할 수 있지요. 집사람과는 중매로 만났지만, 둘 다 어릴 적부터 이런 문화를 잘 알기 때문에 굳이 여러 말이 필요 없습니다. 종손으로 산다는 것, 처음엔 좀 부담스러웠지요. 하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이런 자연 속에서 하고 싶은 공부 하면서 산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깨달았습니다. 내가 이곳에서 당당하게 살면 우리 아이들도(2남 1녀) ‘여기서 살겠다’고 할 것입니다. 물론 못 살겠다면 할 수 없지만….”
▼ 회재 이언적의 꼿꼿한 기개 서린 곳… 지훈의 ‘완화삼’ 목월의 ‘나그네’ 산실 ▼


독락당과 옥산서원

독락당의 계정 현판.
독락당의 계정 현판.
독락당(獨樂堂)은 회재 이언적 선생의 기개가 오롯이 담겨 있는 이름이다. ‘홀로 즐기는 집’이라니. 실제 1532년(중종 27년) 회재는 파직을 당하자 이곳에 내려와 5년 동안 칩거했다. 중종 외척인 김안로(1481∼1537)의 등용에 반대하다가 밀려난 것이다. 회재는 자신이 태어난 양동마을로 가지 않았다. 양동마을과 가까운 자옥산 기슭의 부인 집에 머물며 스스로 ‘독락당’이라 이름 붙였다. 홀로 책을 읽고 동산에 떠오른 밝은 달과 노닐었다.

‘무리를 떠났으니 누구와 같이 시를 읊을까/바위의 새와 개울의 물고기 내 얼굴을 익혔구나’

회재는 자계천 시냇가에 담장 밖으로 툭 튀어나온 정자 ‘계정(溪亭)’을 지었다. 자계천 주변 바위에는 세심대(洗心臺), 관어대(계정 아래 받침돌) 등의 이름도 붙였다. 옥산서원 북쪽 외나무다리 앞의 ‘洗心臺’는 퇴계 이황의 글씨. 정조는 이곳에서 지방 유생들을 대상으로 과거마당(초시)을 폈다.

회재는 독락당 주변을 둘러싼 4개의 산도 자옥산(紫玉山), 화개산(華蓋山), 무학산(舞鶴山), 도덕산(道德山)이라고 불렀다. 독락당 뜰엔 향나무, 산수유나무, 주엽나무(천연기념물 제115호)도 손수 심었다. 주엽나무는 명나라 사신으로 다녀온 지인에게서 선물 받은 것. 향나무와 주엽나무는 선비들의 꿋꿋한 기상을 상징한다. 요즘 독락당은 보수공사로 어수선하다. 자계천의 물도 쫄쫄 흐른다. 아무래도 계정을 보는 맛이 덜하다. 그래도 집 앞 왕벚꽃은 흐드러져 꽃비가 내린다. 늙은 산수유도 샛노란 꽃을 울컥울컥 토해내고 있다.

옥산서원(玉山書院)은 회재를 기리기 위해 그의 사후 19년(1572년)에 세웠다. 1573년 선조가 현판을 내린 사액서원이다. 독락당 앞쪽, 양동마을 서편 안강평야 너머에 자리 잡고 있다. 양동마을 동쪽엔 청백리 우재(愚齋) 손중돈 선생(1463∼1529)을 기리기 위해 세운 동강서원이 있다. 양동마을을 중심으로 ‘우 옥산서원, 좌 동강서원’이다.

독락당은 청록파 시인 조지훈(1920∼1968), 박목월(1916∼1978)이 젊은 날 며칠씩 묵으며 시심을 키우기도 했다. 바로 이곳에서 조지훈의 ‘완화삼’, 박목월의 ‘나그네’가 무르익어 태어났다.

‘독락당(獨樂堂) 대월루(對月樓)는/벼랑 꼭대기에 있지만//예부터 그리로 오르는 길이 없다.//누굴까, 저 까마득한 벼랑 끝에 은거하며/내려오는 길을 부숴버린 이.’

(조정권 ‘독락당·獨樂堂’ 전문)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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