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성 전문기자의&joy]‘미륵의 나라’월악산 하늘재를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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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1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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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의 월악산 영봉 아래 마애불을 바라보고 있는 거대한 미륵돌부처. 몸체는 이끼로 거뭇거뭇하지만 얼굴만은 천년이 넘게 깨끗하다. 전설에 따르면, 미륵불은 비운의 신라 마의태자 모습이고, 미륵불이 바라보고 있는 마애불은 그의 누이 덕주공주라고 한다. 남매는 금강산으로 가다가 이곳에 잠시 머물렀다. 미륵돌부처는 몸체에 비해 얼굴이 커서 약간 기형적이다. 미륵불은 문경-충주를 잇는 하늘재 길목에 자리잡고 있다. 신라는 아달라왕 3년(156년)에 한강 유역으로 통하는 하늘재를 확보했다. 하늘재는 백두대간길이며 소백산맥 잔등 중에서 가장 야트막한(525m) 고갯마루이다. 월악산=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북쪽의 월악산 영봉 아래 마애불을 바라보고 있는 거대한 미륵돌부처. 몸체는 이끼로 거뭇거뭇하지만 얼굴만은 천년이 넘게 깨끗하다. 전설에 따르면, 미륵불은 비운의 신라 마의태자 모습이고, 미륵불이 바라보고 있는 마애불은 그의 누이 덕주공주라고 한다. 남매는 금강산으로 가다가 이곳에 잠시 머물렀다. 미륵돌부처는 몸체에 비해 얼굴이 커서 약간 기형적이다. 미륵불은 문경-충주를 잇는 하늘재 길목에 자리잡고 있다. 신라는 아달라왕 3년(156년)에 한강 유역으로 통하는 하늘재를 확보했다. 하늘재는 백두대간길이며 소백산맥 잔등 중에서 가장 야트막한(525m) 고갯마루이다. 월악산=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월악산 난간머리 희미한 저 달아
천년 사직 한이 서린 일천삼백 리 너는 아느냐
아바마마 그리움을 마애불에 심어 놓고
떠나신 우리 님을
월악산아 월악산아 말 좀 해다오 그 님의 소식을
금강산 천리 먼 길 흘러가는 저 구름아
마의태자 덕주공주 한 많은 사연 너는 아느냐
하늘도 부끄러워 짚신에 삿갓 쓰고
걸어온 하늘재를
월악산아 월악산아 말 좀 해다오 그 님의 소식을

<백봉 작사 작곡 주현미 노래 ‘월악산’>
● 미륵불은 마애불 보고 웃고, 마애불은 미륵불 보고 웃고

월악산은 부처의 땅이다. 월악산 하늘재 아래 미륵리엔 거대한 미륵돌부처(10.6m)가 우뚝 서 있다. 미륵돌부처는 북쪽 월악산 영봉을 바라보고 있다. 역시 영봉 아래 암벽에선 거대한 마애불(13m)이 남쪽의 미륵돌부처를 바라본다. 미륵돌부처는 마애불 보고 웃고, 마애불은 미륵돌부처 보고 웃는다.

두 부처의 거리는 남북 일직선으로 3km쯤 될까. 사람들은 ‘미륵돌부처는 마의태자이고, 마애불은 그의 누이 덕주공주’라고 말한다. 그들은 신라가 망하자 금강산으로 가는 도중 이곳에 절을 짓고 잠시 머물렀다는 것이다. 남매가 서로 마주보며 애틋한 정을 나누고 있는 모습이다. 나라에 큰일이 생기면 두 부처 사이에 오색 무지개가 펼쳐진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두 부처는 모두 투박하다. 마애불은 아예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여자의 형상인데도 큼지막한 눈, 코, 입에 늘어진 턱까지 언뜻 보면 유치원생이 그린 ‘비뚤배뚤한 그림’ 같다. 미륵돌부처도 전체적으로 돌돌 말려 균형이 맞지 않는다. 머리에서 발끝까지가 원통형이어서 입체감이 부족하다. 얼굴은 마애불보다 한결 낫다. 기다란 초승달 눈썹에 굳게 감은 일자 눈, 두꺼운 입술, 넙적한 코 등 나름대로 소박하다. 게다가 얼굴색이 언제나 하얗다. 이끼로 거뭇거뭇해진 몸체와 딴판이다. 햇살이 얼굴에만 비쳐서 그럴까. 아니면 머리에 쓴 갓 덕분에 빗물을 피해서 그럴까.

하늘재는 소백산맥 잔등 중에서 가장 야트막한 곳이다. 해발 525m의 말안장처럼 움푹 들어간 고갯마루다. 하지만 밑에서 보면 연 꼬리처럼 고갯길이 푸른 하늘에 걸려 있다. 신라시대엔 계립령(鷄立嶺)이라 불렀다. 오늘날 ‘닷돈재-지릅재-하늘재’ 3고개를 통틀어 계립령이라고 한 것이다. 지릅은 삼 줄기 ‘겨릅’의 사투리. 닷 돈은 엽전 다섯 돈을 뜻한다. 이 고개를 넘으려면 ‘산적들에게 닷 돈을 줘야 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계립령은 조선시대에 하늘재로 굳어졌다.

길이 열리면 세상이 열린다. 세상이 열리면, 나라가 뻗어난다. 신라는 아달라왕 3년(156년)에 마침내 한강 유역으로 통하는 하늘재를 뚫었다. 백제가 숨통을 조이고 있던 목젖을 확보한 것이다. 신라로선 일대 대사건이었다. 상주-문경을 넘어 충주(중원)로 가는 고갯마루가 활짝 트였다. 낙동강을 넘어 한강 유역으로 가는 물길을 열어젖힌 것이다.

오늘날 하늘재는 문경 관음리와 충주 미륵리를 연결하는 길(약 3.5km)을 말한다. 지릅재, 닷돈재는 제외된다. 하늘재의 문경 쪽 시작점은 관음보살의 관음리, 충주 쪽은 미륵보살의 미륵리다. 고통받는 중생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현세부처와 언젠가 메시아로 오실 미래의 미륵부처가 한 길로 이어져 있다. 관음리는 아스팔트길, 미륵리는 흙길이다. 의미심장하다.

피겨여왕 김연아의 스파이럴 자세를 닮은 김연아소나무.
피겨여왕 김연아의 스파이럴 자세를 닮은 김연아소나무.
눈 덮인 하늘길. 미륵리에서 고갯마루까지는 한 시간이면 충분하다. 뽀드득뽀드득 눈 밟는 맛이 그만이다. 솔바람 골바람에 머릿속이 박하처럼 맑아진다. 고갯마루가 반공중에 걸려 있다. 중간에 ‘김연아 소나무’가 눈길을 끈다. 김연아의 피겨스케이팅 스파이럴 자세와 닮았다.

‘그대는 원래 천상의 선녀였나/참수리 날갯짓 우아하고 강력하게/그랜드슬램을 이룬 어느 날/월악산 하늘재에/숨겨둔 날개옷 찾아 입고/하늘로 돌아가기 전/마지막 연기를 펼치다가/차마, 지상의 사랑을 떨치지 못하여/절정의 동작 그대로/한 그루 소나무가 되었구나’ (박윤규 ‘소나무’에서)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
미륵리에서 바라본 월악산. 부처님이 누워 있는 모습이다.
미륵리에서 바라본 월악산. 부처님이 누워 있는 모습이다.

▼ 비운의 마의태자가 월악산에 머문 까닭은


신라 마의태자는 아직도 전국 곳곳에 살아 있다. 전설로 꿋꿋하게 남아 있다. 1000여 년의 세월도 ‘스토리텔링’을 이기지는 못했다. 마의태자는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978)의 장남이다. 935년 경순왕이 고려 왕건에게 나라를 바칠 때 가장 앞장서 반대했다. 결국 신라가 망하자 금강산에 들어가 풀뿌리를 캐어 먹고 살다가 죽었다고 한다.

마의태자 이름은 김일(金鎰) 혹은 김부(金富). 그는 왜 동해안을 따라 금강산에 가지 않았을까. 왜 쉬운 길을 두고 하필 험한 내륙 산길을 택했을까. 그는 경주∼영주 부석사∼문경∼월악산∼여주 신륵사∼양평 용문사∼홍천∼인제를 거쳐 금강산에 들어간 것으로 전해진다. 여주 신륵사에선 은행나무 가지를 꺾어 지팡이로 삼았다. 양평 용문산에선 그 지팡이를 땅에 꽂으며 “단단히 뿌리를 내려 못다 한 신라 천년사직을 대신해 달라”고 말했다. 그 지팡이가 오늘날 ‘용문사 천년 은행나무로 자랐다’는 것이다.

당시 충주는 막강한 호족 유씨가 장악하고 있었다. 마의태자가 세웠다는 월악산 미륵사도 충주 유씨의 후원 없인 불가능했다. 덕주공주가 세웠다는 덕주사도 마찬가지. 그들은 이미 왕건의 강력한 지지 세력이었다. 왕건과 충주 유씨의 딸이 결혼함으로써 사돈지간이 된 것이다. 그러한 충주 호족이 뭐가 아쉬워 망한 나라의 태자와 공주를 감쌌을까. 차라리 그 두 곳에 이들을 유폐시키고 감시했다고 보는 게 수긍이 간다.

실제 고려는 978년 경순왕이 개경에서 눈을 감자 ‘왕릉은 개경 100리 밖에 쓸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경주에 묘를 쓰려던 옛 신하들의 뜻을 막았다. 경주의 저항세력들에게 조금이라도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한 조치였다. 경순왕릉이 신라왕 중에서 유일하게 경주 밖인 경기 연천에 자리 잡고 있는 이유다.

아마도 마의태자가 월악산 미륵사 연금에서 풀려난 것도 누이인 덕주공주와 분리시키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태자와 공주가 같은 곳에 있으면 그 구심점이 커지기 때문이다. 더구나 충주와 가까운 청주(서원)에는 궁예를 따랐던 호족들이 많이 남아 있어 늘 불안했을 것이다. 한때 청주 호족 1000여 명은 철원으로 이주해, 궁예의 친위세력을 이룰 정도로 충성도가 높았다. 그들은 이미 몇 차례나 왕건에게 반란을 꾀하다가 진압됐다.

마의태자는 인제 산악에서 신라부흥운동을 한 흔적이 전설로 남아 있다. 마의태자가 옥새를 숨겼다는 ‘옥새바위’, 그가 수레를 타고 넘었다는 ‘수거너머’, 군량을 저장한 ‘군량리’, 신라부흥운동의 중심지였다는 ‘김부리(金富里)’, 마의태자 휘하 맹장군 이름을 땄다는 ‘맹개골’….

마의태자는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금강산으로 숨어들었다가, 결국 두만강을 건너 여진족에 합류했다는 전설도 내려온다.
▼ 달이 산봉우리에 걸리면 신령한 기운이… ▼


● 월악산은

제천 덕산에서 바라본 월악산 영봉. 여인의 젖가슴을 닮았다.
제천 덕산에서 바라본 월악산 영봉. 여인의 젖가슴을 닮았다.
월악산은 ‘달의 바위산’이다. ‘산꼭대기 바위덩어리에 달이 걸리는 산’이다. 그래서 월악산(月岳山)이다. 주봉우리가 신령스러운 ‘영봉(靈峰·1097m)’으로 불리는 산은 백두산과 월악산 단 두 곳뿐이다. 사람들은 영봉에 올라가 간절히 소원을 빌면 이뤄진다고 믿는다. 하지만 여자산신령이 머무는 곳이라 음기가 강하다.

실제 모습도 여인의 모습이다. 충주호 쪽에서 올려다보면 여인이 긴 머리를 늘어뜨린 채 누워있는 모습이고, 제천 덕산 쪽에서 보면 영락없는 여인의 젖가슴이다. 미륵리에서 보면 부처님이 누워있는 형상이다. 산 아래 덕주사에는 남근석이 3개나 서 있다. 강한 음기를 누르려는 흔적이다.

봉우리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다. 무려 높이 150m, 둘레 4km나 된다. 설악산 치악산과 더불어 ‘3대 악산’이다. 언뜻 보면 소박하지만, 찬찬히 살펴보면 설악산만큼 화려하고, 지리산처럼 장엄하다. 그만큼 기가 세다. 요즘 월악산은 한 폭의 수묵화다. 거뭇한 바위 곳곳에 하얀 눈과 껑충 솟은 소나무가 독야청청하다.

월악산은 녹두장군 전봉준(1855∼1895)이 죽은 후, 동학의 남접 우두머리 서장옥(?∼1900)이 남은 농민군을 이끌고 전투를 벌인 현장이다. 남부군사령관 이현상(1906∼1953)이 지리산에서 죽은 후, 남은 빨치산들이 소백산맥을 타고 북쪽으로 가다가 죽은 곳이기도 하다. 조선 말 명성황후(1851∼1895)가 별궁을 짓다가 그만둔 터도 남아 있다. 월악산은 대부분 제천과 충주에 걸쳐 있다. 소백산과 속리산 중간이다. 충북과 경북의 경계를 이룬다. 제천 지역은 바위가 톱니 날처럼 뾰족하고, 비탈길이 실낱처럼 위태롭다. 아무래도 물길 고갯길이 잘 통하는 충주 지역에 사람과 물산이 몰릴 수밖에 없다. 남한강이 월악산을 휘돌아 나가고 발밑엔 충주호가 푸른 눈동자처럼 빛난다. 월악산이 통째로 충주호에 담겨 있다. 구름이 호수물 속을 한가롭게 떠돈다. 산행은 보통 덕주골에서 영봉으로 올라가는 코스를 택한다. 영봉에서 어디로 내려오든 6∼7시간쯤 걸린다. 월악산국립공원사무소 043-653-3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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