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걸크러시]〈11〉남장 여성과 결혼한 여성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1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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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관주와 같은 여성 영웅을 만나 평생의 친구가 되어 부부의 도리와 형제의 정을 맺고 일생을 마치는 것이 바로 나의 소원이다. 나는 원래 한 남자의 부인이 되어 남편의 통제를 받으면서 남편에게 아름답게 보이려고 화장하는 것을 괴롭게 여겼으며, 부부로서 화목하게 살아가는 삶을 원하지 않았다.”

―고전소설 ‘방한림전’에서

19세기부터 주체적인 여성의식이 조금씩 감지되기 시작했다. 소박맞은 여성이 오히려 이혼을 요구하는 문서를 관에 제출했는데, 그가 내세운 이혼 사유는 놀랍게도 남편이 정상적인 부부관계를 거부했다는 것이었다. 변화된 여성의식을 수용하지 못한 사또가 실정법을 무리하게 적용하면서 악인으로 전락한 ‘춘향전’이 등장했다. 이러한 흐름에서 고전소설은 변화하는 여성의식을 수용하고 흥미를 더해 영웅을 만들어내는데, 그 극단에 ‘방한림전’이 있다. 조선인의 상상을 초월하는 새로운 서사와 캐릭터를 만들어냈는데 바로 여성 동성혼의 서사와 방관주 및 영혜빙이라는 여성 주인공이다.

방관주는 스스로 여성의 정체성을 포기하고 남성의 모습으로 살아간다. 부모 역시 그가 선택한 삶을 존중한다. 부모가 죽은 후 자아실현의 의지를 펼치는데, 다른 여성영웅소설과 달리 타인의 도움 없이 스스로 운명을 개척한다. “나는 비록 여자이지만 남자로 세상을 살아가는데, 어찌 여자가 남편 섬기는 도를 내가 행할 수 있겠는가!” 방관주는 이렇게 외치며 과거에 응시해 장원급제하고 사회와 국가에서 최고의 인물로 인정받는다.

방관주 앞에 영혜빙이 등장한다. 영혜빙은 최고의 가문에서 7남 4녀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가부장적인 오빠들은 영혜빙의 활달함을 조롱했고 부모는 성격이 이상하다고 여겨 걱정했다. 영혜빙은 혼사가 오가는 방관주를 한 번 보고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는 사실과 남자로 변장한 사정을 간파한다. 그리고 유교적 삶을 요구하는 남성 대신 남장 여성이라도 영웅을 만나 부부나 형제처럼 사는 게 소원이라고 당당하게 밝힌다. 가부장적인 남편보다는 서로를 알아주는 지기(知己)를 원했던 영혜빙은 남성의 통제를 받는 것도, 남성을 위해 화장하는 것도, 한 남성만을 섬기며 사는 것도 모두 거부했다.

영혜빙은 방관주의 남성 삶을 지킬 수 있게 도와줬으며, 원했던 이상적인 부부관계를 만들어간다. 자식이 없어 의심받던 이들은 아이를 입양하고 가족을 완성한다. 방관주는 죽기 직전 황제에게 여성이지만 남성의 삶을 살았고 영혜빙과 가정을 꾸리게 된 과정을 설명한 뒤 용서를 구한다. 황제는 놀라면서도 업적과 희생정신을 공식적으로 인정한다. 방관주는 39세의 나이로 죽고 영혜빙 역시 뒤따라 유명을 달리한다.

두 주인공은 사회에서 자신의 역할을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이상적인 부부관계를 보여줬다. 영혜빙은 남성에게 얽매이는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동성혼을 선택했으나 ‘방한림전’의 서술자와 등장인물인 황제는 ‘기괴하지만 아름다운 이야기이자 기특한 일’이라며 위로한다. 이 이야기는 조선 후기 서서히 싹트기 시작한 주체적 여성의식을 반영해 당시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동성혼을 완성했다. 실로 놀라울 따름이다.
 
강문종 제주대 교수
#방한림전#춘향전#방관주#영혜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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