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 왕진의 죽음[임용한의 전쟁史]〈99〉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3월 3일 03시 00분


코멘트
임용한 역사학자
임용한 역사학자
1449년 52만 대군이 베이징을 출발해 산시성으로 향했다. 황제 영종과 영종의 스승이었던 환관 왕진이 친정하는 몽골 정벌군이었다. 에센이라는 영웅이 지도하는 몽골족 일파 오이라트족이 명나라에 반기를 들자 영종이 오이라트를 정벌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명 군대는 장단점이 극명하고, 장점은 적었다. 거의 유일한 장점은 화약무기와 이를 활용한 수성전이었다. 특히 유목기병에게는 대단히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화기도 아직은 성능이 미숙해서 야전에 나가면 상대가 되지 않았다. 누구보다 명군의 약점을 잘 알았던 사람은 군 지휘관들이었다. 오이라트군이 근접하자 명군 지휘관들은 무릎을 꿇고 철군하자고 애원했다. 하지만 영종과 왕진은 꿈쩍하지 않았다.

이 친정의 주역은 영종이 아닌 환관 왕진이었다. 그러나 도대체 어디서 이런 용기가 솟아났는지는 미스터리다. 무지에 의한 용기였을 것이란 추정 말고는 달리 이유가 없다. 출정을 강행한 이유는 무엇일까? 왕진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중국 역사에서도 초유의 권력을 지닌 환관이었다. 그의 부정 축재는 중국 몇 년 치 재정에 해당할 정도였다. 비난이 없을 수 없고, 이런 비난을 잠재우고자 거대한 이벤트를 기획했던 것 같다. 하지만 황제와 자신은 속여도 현실을 속일 수는 없었다.

서전에서 명군은 참혹하게 패했다. 그제야 왕진은 후퇴를 결정했다. 그러나 패전의 책임이 두려웠던 그는 자신의 별장이 있는 쪽으로 빙 돌아 후퇴했다. 별장에서 연회를 베풀어 영종의 마음을 위로하려는 속셈이었다고 한다. 이 실수로 그들은 오이라트군에 따라잡혔다. 왕진은 살해되고 영종은 포로가 되어 명나라가 망할 뻔했다. 쉽게 돈을 벌고 쉽게 성공하면 세상을 우습게 본다. 이벤트로 정치를 하면 국민이 어리석어 보이고, 이벤트의 힘을 과신한다. 나라를 얻기보다 유지하기가 힘들다. 쇼로 사람들을 현혹할 수는 있지만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왕진이 주는 교훈은 세상을 속이는 자는 결국 자신에게 속아 파멸한다는 경고이다.
 
임용한 역사학자
#환관 왕진#중국 역사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