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한 땅의 전쟁[임용한의 전쟁史]〈79〉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0월 15일 03시 00분


코멘트
그리스에서 종교적으로 가장 신성한 지역은 어디일까? 고대 그리스를 기준으로 보면 아폴론의 신전이 있는 델포이일 것이다. 근현대를 기준으로 하면 동방정교회의 수도원이 밀집한 메테오라다. 메테오라는 ‘공중에 매달린 바위’ ‘하늘 위에 떠 있다’ 등의 뜻이다. 아테네에서 5시간 이상 걸리는 북부 테살리아 지역에 위치한 이곳은 “세상에 메테오라 같은 곳은 메테오라밖에 없다”는 말도 있을 정도로 수직의 바위와 기암괴석, 그 위에 세워진 그림 같은 수도원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많이 놓치는 것이 하나 있다. 이곳이 제1차, 2차 세계대전의 격전지였다는 사실이다. 이곳에는 현재 6개의 수도원이 남아 있는데 그중에서 제일 큰 그레이트 메테오라 수도원에 가면 당시의 전쟁화를 전시하는 복도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지도 않고 지나치는 이 공간에는 약소국이었던 그리스가 독일과 이탈리아와 어떻게 싸워 나라를 지켰는지 비장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리스군은 메테오라의 지형을 이용해서 산 위에 거점을 마련하고 대포를 분해해 로프에 매달아 바위 산 위로 끌어올렸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탄약상자와 보급품을 지고, 수직 절벽을 오르고, 남자들이 절벽 위에서 총탄을 퍼붓는 동안 여인들은 돌을 집어 절벽 아래로 던졌다. 조금은 과도하게 감성적이고 애국적인 냄새가 나기도 하지만, 약소국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이 신성한 장소가 피의 격전지였다는 사실이 서글프거나 놀랍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소중한 것, 나아가 고귀하고 신성하기까지 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피와 땀 없이는 지킬 수 없다. 알고 보면 고대 아테네의 정치의 중심이었고, 그리스 문화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파르테논 신전이 위치한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도 본래의 기능은 요새이다. 요즘 우리 사회가 자꾸 이 기본적인 진리를 잊고, 심지어는 의도적으로 부정하기까지 하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다.

임용한 역사학자
#고대 아테네#파르테논 신전#아크로폴리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