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名문장]‘을’을 위하여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4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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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진호 직장갑질119 운영위원
오진호 직장갑질119 운영위원
“아니, 몇 마디만 써 보내도 그쪽은 느낌이 크게 다를 거야. 내 얘기를 누가 들어주기만 해도 고마웠던 일, 자주 있었잖아?”―히가시노 게이고,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상담을 우습게 봤다. 몇 달간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채팅방에 남긴 직장인의 한마디에 어쩔 줄 몰랐고, e메일로 보낸 피해 사례를 읽으며 밤을 지새웠다. ‘갑질’에 시달려 심신이 망가진 이들의 절규와 신고할 힘도 남지 않은 이들의 호소에 도리어 내가 우울해지기도 했다. 그렇게 밤을 지새우다가 이 책을 만났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은 폐가에 숨어든 3인조가 하룻밤 동안 겪는 이야기다. 30년 전 잡화점에서 고민 상담을 해주던 나미야 유지와 과거로부터 온 상담편지를 받은 3인조는 누가 보냈는지도 모르는 상담편지에 정성스레 답한다. 상대방의 얼굴도, 나이도 모르고 상담한다는 점에서 내가 하는 일과 닮았다. 하루에 들어오는 상담(제보)은 대략 e메일 20건, 채팅 상담 50건.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이, 상사의 폭언으로 우울증에 시달리는 이, 하루아침에 해고됐지만 구제받을 수 없는 이들이 채팅방을 두드린다. 비슷한 사연으로 채팅방을 찾은 ‘을’들이 동병상련으로 서로를 위로한다. 해결 방법을 제시하는 답변에 작은 용기를 얻는다.

다만 법이 현실에 등 돌릴 때, 답변은 궁색해진다. 공휴일을 연차휴가로 대체해 휴가가 없다는 것이 합법인지를 묻는 상담자, 해고당한 후 구제신청을 했더니 사장이 복직 명령을 내렸다는 상담자, 회사가 퇴직 사유를 다르게 입력해 실업급여를 못 받는다며 하소연하는 상담자들을 만나면 한숨부터 나온다. ‘갑’은 법의 사각지대를 누구보다 잘 안다. 갑에겐 법보다 주먹이 가깝고, 을에겐 신고보다 불이익이 두렵다. 노동 존중이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은 이유다. 오늘도 힘없는 직장인들에게 외친다. 갑질을 당하면 반드시 기록하라고.

오진호 직장갑질119 운영위원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갑질#직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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