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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의 길]다들 울거들랑 젖을 먹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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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의 길]다들 울거들랑 젖을 먹이시오

김응교 시인·숙명여대 교수입력 2017-11-08 03:00수정 2017-11-08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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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누상동 9번지
크게보기서울 종로구 누상동 9에 있는 윤동주 하숙집 터(왼쪽 사진). 지금은 양옥 주택이 들어섰고 작은 안내판 하나만 남았다. 윤동주는 1941년 5월부터 3개월 동안 이곳에 머무르며 ‘십자가’(오른쪽 사진)를 썼다. 양회성 기자yohan@donga.com·유족 대표 윤인석 교수 제공

“동주는 말이 없다가도 이따금 한마디씩 하면 뜻밖의 소리로 좌중을 놀라게 했다”는 친구 유영의 증언처럼, 말수 적은 동주가 글을 남기지 않은 두 번의 침묵기가 있었다. 1938년 연희전문 1학년 9, 10월경 몇 편 쓰고 9개월쯤 지나고, 2학년 1939년 9월에 ‘자화상’, ‘투루게네프의 언덕’ 등을 쓴다. 다시 긴 침묵으로 들어가 1940년 12월까지 1년 2, 3개월의 침묵 기간을 지낸다.

침묵을 끝내고 ‘팔복’ ‘위로’ ‘병원’을 쓴다.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팔복’)라는 말은 끝없는 절망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슬퍼하는 자와 함께 슬퍼하는 것이 행복하다는 말이다. ‘팔복’은 냉소적인 풍자 혹은 절망시일까. 오히려 “슬퍼하는 자(와 함께하는 이)는 복이 있다”는 예수의 말에 적극적으로 긍정한 시다.

‘팔복’과 같은 시기인 1940년 12월에 쓴 ‘병원’을 보면 더 명확하다. ‘나도 모를 병’을 의사도 모른다 한다. 병원이라는 공간은 식민지 공간의 은유일 수 있다. 3연 끝 문장을 보면 병원에서 영원히 슬플 행복을 살며시 언급한다.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본다.’

‘팔복’과 ‘병원’에 나오는 인간은 인간으로서 대우받지 못하는 존재다. 침묵기 이후 동주는 또 한 번의 큰 변화를 서울 종로구 누상동 하숙집에서 겪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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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전문 입학하고 3년 동안 기숙사에서 지내고 2학년 때 1939년에는 신촌, 북아현동과 서소문에서 하숙했고, 3학년 때 다시 기숙사로 돌아갔다. 4학년 때인 1941년 5월 초 정병욱과 함께 기숙사를 나온다.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기숙사 식사가 변변치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고, 산문 ‘종시’에는 생활을 더 알기 위해 성문 안으로 들어가 살기로 했다는 말이 나온다. 윤동주와 정병욱은 누상동에서 옥인동 쪽으로 내려가다 전신주에 붙은 ‘하숙 있음’이라는 쪽지를 발견했다.

‘누상동 9번지였다. 그길로 우리는 그 집을 찾아갔다. 그런데 집주인의 문패는 김송이라 씌어 있었다. 우리는 서로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설마 하고 대문을 두들겨 보았더니 과연 나타난 집주인은 소설가 김송 씨 바로 그분이었다.’(정병욱, ‘잊지 못할 윤동주 형’)

집 주인은 소설가 김송으로 윤동주보다 여덟 살 위였다. 일본 유학 시절의 감옥 체험을 다룬 데뷔작 ‘지옥’을 공연하려다가 중단당한, 당연히 피해야 할 기피 인물이건만 두 사람은 오히려 김송의 집을 하숙집으로 정한다.

성악가인 부인의 노래를 가끔 들을 수 있는 ‘오붓하고 가족적인 분위기’를 누렸다. ‘아침 식사 전에는 누상동 뒷산인 인왕산 중턱까지 산책’하며 계곡물에 아무렇게나 세수하기도 했다. 겸재 정선(1676∼1759)의 ‘장동팔경첩’에 나오는 돌다리 기린교가 등장하는 수성동 계곡 그 근방일 것이다. ‘하학 후에는 충무로 책방들을 순방하였다. 음악다방에 들러 음악을 즐기면서 우선 새로 산 책을 들춰보기도 했다. 오는 길에 명치좌에 재미있는 프로가 있으면 영화를 보기도’ 하며 경성(서울) 생활을 즐겼다.

1941년 5월 그믐부터 9월, 불과 3개월만 지낸 이 집에서 동주는 ‘또 태초의 아침’ ‘십자가’ ‘눈 감고 가다’ ‘돌아와 보는 밤’ ‘바람이 불어’ 등 9편의 시를 쓴다. 효자동 종점에서, 전차와 기차에서 동주는 식민지 경성 사람들의 내면을 본다.

다들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검은 옷을 입히시오.
다들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흰옷을 입히시오.
그리고 한 침대(寢臺)에
가지런히 잠을 재우시오.
다들 울거들랑
젖을 먹이시오.
 
―‘새벽이 올 때까지’(1941년 5월)

 

‘다들 죽어가는’이라는 표현은 여기서 처음 나온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살아있지만 죽어가는 사람들이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표현은 6개월 전 이런 모양새로 나왔다. ‘죽어가는 사람들’과 ‘살아가는 사람들’이 함께 옷을 입고, 잠을 자며 쉬고, 서로 젖을 먹으며 힘을 내잔다.

윤동주는 스스로 죽어가는 존재와 동일시했다. 그래서 ‘고향(故鄕)에 돌아온 날 밤에/내 백골(白骨)이 따라와 한방에 누웠’고, ‘백골(白骨)을 들여다보며/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백골(白骨)이 우는 것이냐’(‘또 다른 고향’)라고 한탄하기도 했다.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幸福)한 예수·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십자가’(1941년 5월 31일)

 
이 시를 쓴 때는 1941년 5월 31일이다. 다만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이라는 문장은 11월경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수정할 때 썼던 얇은 펜으로 쓰여 있다. 동주는 왜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라는 문장을 삽입했을까.

쇠붙이를 녹여 무기로 만들려고 일제는 모든 쇠붙이를 쓸어갔다. 1941년 10월경부터 조선 교회의 노회 보고서에 따르면 ‘자발적으로’ 교회 종(鐘)을 떼어 바치는 보고서가 나오기 시작했다. 조선감리교단연맹은 1941년 10월 21일 이사회를 열고 제4항 ‘각 교회 소유의 철문과 철책 등을 헌납’하기로 결의했다. 아침예배 후 ‘영미응징승전기원’을 하고, 애국헌금도 하기로 결의했다. 1942년에는 ‘조선장로호’라는 이름이 붙은 해군함상전투기 1기와 기관총 7정 구입비 15만317원50전을 바치기도 했다. 당연히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끔찍한 상황이다.

김응교 시인·숙명여대 교수
희망이 없는 시대에 그는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린다. 이후 극적 전환이 이루어진다.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처럼’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동주는 알고 있었다.

‘모든 죽어가는 것’이야말로 슬픔이 아닐 수 없다. 죽어가는 존재들, 병들거나 굶주려 죽어가거나, 징용되어 죽어가거나, 사라져가는 한글, 모든 슬픈 존재들이다. 타인의 괴로움을 외면치 않고 그 고통을 나누는 순간, 개인은 행복한 주체가 된다. 그들과 슬퍼하는 것, 곁으로 가는 것이 삶이며 신앙이라는 깨달음이다.
 
김응교 시인·숙명여대 교수
#윤동주#다들 울거들랑 젖을 먹이시오#시 새벽이 올 때까지#시 십자가#함께 슬퍼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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