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정훈의 호모부커스]<88>역자 후기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2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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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본문 뒤에 덧붙여 기록한 글을 후기(後記)라 한다. 소설책에도 작품이나 창작 과정에 관한 작가 자신의 생각이 후기로 실리곤 한다. 독자에게 큰 도움이 되는 후기는 번역서의 역자(譯者) 후기 또는 ‘옮긴이의 말’이다. 어떤 책의 역자는 그 책을 가장 꼼꼼하게 읽은 첫 독자이기도 하다. 그런 역자가 책의 배경과 대강을 소개하고 핵심을 설명하는 역자 후기는 간략한 해제(解題) 구실을 한다.

번역가 김석희는 역자 후기 60편을 모아 ‘북마니아를 위한 에필로그60’(1997년)을 냈다. 1979년에 낸 첫 번역서인 뱅자맹 콩스탕의 ‘아돌프’ 역자 후기에서 그가 말한다. “감히 용기를 내어 번역에 손을 대면서도 모자라는 프랑스어 실력과 어설픈 솜씨로 졸렬한 모습으로 만들지나 않을까 두렵다.” 번역가들의 이렇게 삼가는 초심(初心) 때문인지, 책 앞부분에 역자 서문을 싣는 경우는 드물고 대부분 본문 뒤 후기다.

불문학자 김화영은 1974년부터 2014년까지 번역한 프랑스 문학·문화에 관한 책의 역자 후기를 모아 ‘김화영의 번역수첩’(2015년)을 냈다. 분량이 많고 적고 간에 역자 후기 쓰는 걸 버거워하는 번역가가 많다. 김화영이 그 이유를 말해준다.

“한 권의 책을 번역하는 수고가 끝나면, 완주 지점에 어렵게 도착한 마라톤 선수에게 한 바퀴만 더 돌고 오라는 주문처럼 또 하나의 고단한 일이 눈앞에 놓인다. 바로 역자 후기라는 글쓰기 주문이다. 역자 후기는 지치고 지친 마라톤 주자가 마지막 남은 기운을 긁어모아 단내 나는 호흡으로 추가하여 질주한 한 바퀴의 기록이다.”

우리 역사 최초의 번역시집 ‘두시언해’(1481년)의 두 번째 판각본(1632년) 서문, 그러니까 역자 서문이 아니라 번역서 서문은 계곡 장유(1587∼1638)가 썼다. “배우는 이가 주해를 참고해도 잘 이해하지 못하면 번역을 보아야 할 터”라며 한글을 낮춰 보는 것 같으면서도 한글 번역이 가장 쉬운 이해의 길이라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좋은 역자 후기란 어떤 것일까? 번역가 노승영의 대답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독자의 자유로운 읽기와 해석에 과도하게 개입하지 않되, 책을 더 풍부하고 흥미롭게 읽을 수 있도록 실마리를 제시하는 역자 후기라면 사족 이상의 읽을거리라 할 수 있지 않을까?”(‘북클럽 오리진’)

책(원서)과 독자 사이를 매개하는 번역가의 노고에는 마침표가 없다.

표정훈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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