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정훈의 호모부커스]<86>겨울 독서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1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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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훈 출판평론가
표정훈 출판평론가
‘한밤중 눈 속 매화 가지 비껴 있고 달빛은 책상 위 책을 가만히 비추네. 여린 불로 느긋이 차 끓이고 술 데우자 은근한 향 넘치네. 흐린 등불이 걸린 오래된 벽으로 반짝반짝 새벽빛이 서서히 찾아든다.’ 양반가 여인 서영수합(1753∼1823)의 한시 ‘겨울밤 책을 읽으며’다. 역시 여성 시인인 김청한당(1853∼1890)이 ‘11월의 밤’을 읊는다. ‘겨울밤 둥근 달 눈부시게 숲을 비추네. 등불 아래 책 보고 있자니 내 심사도 밤과 더불어 깊어 간다.’(강혜선, ‘여성 한시 선집’)

가을을 독서의 계절이라 하지만 책에 몰두하기는 겨울이 제격이다. 중국 후한 시대 학자 동우(董遇)가 책 읽을 시간 내기 어렵다는 이에게 말했다. “겨울은 한 해의 남은 시간, 밤은 하루의 남은 시간, 비 내리면 한때의 남은 시간이니 이때야말로 책 읽기 적당하다.” 책 읽기 좋은 세 가지 남은 시간, 독서삼여(讀書三餘)의 고사다.

계절에 따라 읽기 좋은 분야가 있을까? 청나라 문인 장조(張潮·1650∼1707)는 ‘유몽영’에서 ‘겨울에는 경서, 여름에는 역사, 가을에는 사상, 봄에는 문학’이라 하였다. 덧붙여 조언한다. ‘역사는 친구들과 함께 읽고 경서는 홀로 몰두하여 읽는 것이 좋다.’ 왜 겨울에 경서인가? 정신을 오롯이 집중하기(神專·신전) 좋기 때문이다.

명나라 문인 양천상(楊天祥)은 책 한 페이지를 100번 읽고 나서야 다음 페이지로 넘어갔다. 손님이 찾아와도 100번 읽기 전까지는 상대하지 않았고 밥을 먹지도, 잠자리에 들지도 않았다. 그는 이렇게 반복 독서를 하다가 졸음이 쏟아지면 얼음물에 발을 담그곤 하였다. 한겨울에도 그렇게 하다가 동상에 걸려 발을 잃었다.

조선이든 중국이든 전통 시대 겨울나기는 힘들었다. ‘차가운 서재라 벼룻물이 얼 텐데, 숯 한 섬으로 그런대로 질화로의 훈기를 갖추고, 백지 한 묶음은 혹시라도 책을 베끼는 데 쓰기 바라네. 붓이 얼어 급히 쓰네’(박상수 옮김). 퇴계 이황이 제자 조목에게 보낸 편지다. 서양이라고 달랐을까? 14세기 인문주의자 페트라르카는 추운 겨울밤 연구에 몰두하는 제자 보카치오에게 귀한 털외투를 주었다.

연말이 다가오면서 이런저런 약속도 많이 잡히고 마음이 분망해지기 쉬운가 하면, 추위에 움츠러들며 자칫 기분이 가라앉기도 쉽다. 평정을 되찾고 기분을 다스리는 데 책 속으로 피한(避寒)하는 겨울밤 독서만 한 것도 드물다.
 
표정훈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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