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은영의 부모마음 아이마음]왜 책상 위 크레파스를 치웠다고 소리칠까?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8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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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원칙에 집착하는 아이

일러스트레이션 김충민 기자 kcm0514@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충민 기자 kcm0514@donga.com
오은영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소아청소년클리닉 원장
오은영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소아청소년클리닉 원장
아침에 일어난 동우에게 엄마가 말했다. “오늘 학교 다녀와서 미술학원 갔다 오면 저녁에 탕수육 해줄게.” 엄마는 항상 동우에게 전날 혹은 그날 아침 오늘 무슨 일이 있을 것인지를 말해준다. 동우는 뭐든 자기가 미리 알고 있어야 순순히 따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가 학교 간 사이 내일 가기로 한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담당의사가 갑자기 불가피한 일이 생겨 며칠 병원에 못 나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병원에서는 혹시 오늘 올 수 있느냐고 물었다. 엄마는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사실 대답을 하면서도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아, 또 얼마나 난리를 치려나.’ 아니나 다를까 학교에서 돌아온 동우한테 이 사실을 전하자 난리가 났다. 아이는 병원에 가지 않겠다며 악까지 쓰며 소리를 질렀다.

세상을 살다 보면 예상치 못한 스케줄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처음 정해 놓은 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으면 난리가 나는 아이들이 있다. 우리는 흔히 이런 아이들을 ‘고집이 세다, 성격이 까탈스럽다’고 오해한다. 물론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행동을 하는 더 많은 아이들은 ‘불안’ 때문에 그런다. 그런 상황이 되면 뭔가 안전하지 않다고 느껴져 마음이 불편해진다. 그래서 주변을 과잉 통제하려고 하는 것이다. 어떤 아이는 책상 위에 있던 크레파스가 유치원에 갔다 와서도 그 모양 그대로 있어야 한다. 만약 누군가 그 크레파스를 정리해 놓으면 그대로 해 놓으라며 소리 지르며 울기도 한다. 또 어떤 아이는 엄마와 외출했다가 돌아올 때 매번 자기가 현관문 번호키를 눌렀었는데, 엄마가 깜박 잊고 한 번이라도 누르면 난리를 치기도 한다. 모두 불안해서 하는 행동이다.

불안한 아이들은 자기의 틀을 지나치게 고수하고 원칙이나 틀에서 벗어나는 것을 무척 싫어한다. 자신이 예상하지 못한 일이 생기면 못 견딘다. 저항하고 거부한다. 이런 아이들은 이 틀을 벗어나도록 천천히 도와주어야 한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이 틀에서 벗어나라고 강요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부모와 아이가 대립의 위치에 서게 되어 아이의 마음이 더 불편해진다. 마음이 불편해지면 아이는 더더욱 그 틀을 단단히 고수한다. 틀에서 벗어나게 하려면, 그 틀에서 벗어나도 안전하다는 느낌을 스스로 갖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위 사례의 동우 같은 상황이라면 “다음에는 되도록 미리 알려주도록 할게. 엄마가 일부러 알려주지 않은 건 아니야. 엄마도 오늘 갑자기 연락을 받아서 그럴 수밖에 없었어. 그런데 세상을 살다 보면 이런 일이 참 많아. 이런 일은 누가 너를 불편하게 하려고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거든. 가끔은 미리 생각해 놓은 것과 다르게 순서가 바뀔 수도 있는 거야”라고 말해주는 것이 좋다. 아이가 “그럼, 오늘 미술학원에 못 가잖아?”라고 물을 수 있다. 이런 아이들은 순서가 틀어지면 뭔가 잘못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럴 때는 “아니야. 병원 갔다가 가면 돼. 미술 선생님한테 그래도 되는지 엄마가 전화할게”라고 말해준다. 미술 선생님한테 전화를 해서 아이와 직접 통화하도록 해도 좋다. 이렇게 함으로써 아이에게 꼭 정해진 대로 하지 않아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아이가 “안 된다고 하면 어떡해?”라고 걱정을 할 수도 있다. “일단 해보자. 안 된다고 하시면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라고 말해준다. 틀에서 벗어나도 다양한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한 번 틀을 바꿨는데 크게 손해 본 것 없이 괜찮았던 경험, 원래 정한 대로가 아니라 다른 방법도 취할 수 있다는 경험, 누구에게나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기고 그것이 일상의 안전을 깨지 않는다는 경험…. 동우 같은 아이들은 이런 경험을 늘려주어야 한다. 아이의 불안을 인정해주고, 약간씩 틀에서 벗어난 상황을 만들어 아이가 조금씩 나아질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이런 아이들을 대할 때는 다음의 세 가지 메시지가 전달되도록 노력한다. 첫 번째는 틀을 바꾼 것이 의도적이 아니라는 것과 너를 불편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두 번째는 세상에는 그런 일이 자주 발생하는데 그래도 괜찮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틀을 바꿔보는 경험을 해도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고, 안전이 위협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다. 아무리 아이가 억지를 부리는 것처럼 보여도 “그래도 가능하면 너에게 미리 얘기를 해주마. 그렇게 하도록 노력할게”라는 말을 꼭 해준다.

오은영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소아청소년클리닉 원장
#오은영#원칙에 집착하는 아이#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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