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의 한국 블로그]한국의 몸살과 스트레스를 느끼기까지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6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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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 몽골 출신 다문화여성연합 대표
이라 몽골 출신 다문화여성연합 대표
한국 사람들은 찜질방에 들어가 땀을 흘리면서도 “시원하다”고 표현한다. 이걸 알아듣는 데 2, 3년쯤 걸렸다. 이보다 더 어려웠던 말은 ‘몸살’이었다. 한국에 와서 1년쯤 지나 이사를 하면서 들은 얘기다. 이삿짐센터에서 오신 아주머니가 “입주청소는 직접 하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 시켜야 한다”고 했다. 안 그러면 며칠 몸살이 난다고 하면서.

“몸살? 몸살이 뭐예요?”

“아, 모르시나? 몸에 무리가 가서 며칠 쑤시고 아픈 거지.”

“너무 피곤하면 하루 이틀 쉬면 되지, 왜 몸이 쑤시고 아파요?”

몸살이라는 단어를 처음 듣고 남편에게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니 열심히 설명하는데, 여전히 피곤한 것과 몸살의 차이가 이해가 안 갔다. 내가 살던 나라 몽골에서는 들어본 적이 없는 병명이다. 게다가 30대 초반의 젊은 사람이 이해하기에 쉬운 증상도 물론 아니었다. 옛날에 몽골 어르신들이 몸이 불편하다고 하시던 게 이런 증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몸살보다 더 어려웠던 말은 외래어 ‘스트레스(stress)’였다. 한국에선 주변 사람들한테서, 그리고 병원에서 의사한테서도 자주 듣게 되는 말이다. 사람이 살면서 힘들 때도 있고, 기쁠 때도 심심할 때도, 또 때로는 슬플 때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한국에선 인생이란 이름의 여행에서 당연히 겪는 조금의 힘듦, 피할 수 없는 작은 슬픔, 개인차가 있지만 각자가 느끼는 작고 큰 노여움 같은 감정들을 요즘은 ‘스트레스’라는 말로 뭉뚱그려 표현하는가 보다 싶었다. 몽골에서 온 지인들에게 물어봐도 한국에 오기 전에는 이 단어를 들어본 적도 없다고들 한다.

사회주의 체제하에서는 거의 전 국민이 완전 고용된 상태였고, 삶에도 변화가 거의 없었다. 정부가 존재하는 한 굶어 죽을 위험도 거의 없었고, 잘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들 간의 생활수준 차이 또한 그리 크지 않았다. 어쩌면 빈부의 차이가 꽤 있었지만, 인터넷도 없고 민영 신문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일반 국민이 그걸 느끼기 어려웠을 수도 있다. 그래도 무한 경쟁으로 인한 스트레스는 없던 시절이었다.

그때는 학생들이 아침에 학교에 가면 다들 복도에 모여 “정직하게 살고, 공부 열심히 하고, 나라에 애국하고, 이웃을 도와주고” 등의 구호를 다 같이 외운 다음에야 수업을 시작하던 시절이었다. 내가 살던 곳의 몽골 여름방학 숙제라는 것은 흔히 ‘서거르(풀) 씨 2kg, 땅다람쥐 가죽 10장, 가축용 건초 두 묶음’을 모아오라는 식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주변에 흔하던 그 서거르풀 씨를 다 모아선 어디에 썼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다람쥐 가죽은 어디에 쓰려고 했는지 상상하기 어렵다. 다람쥐를 잡으러 가면 일단 양동이에 물을 담아 가서 땅에 난 다람쥐 굴 입구에 물을 부어선 다람쥐가 튀어나오게 하거나, 소똥을 모아 태워선 그 연기를 굴에 불어 넣곤 했다. 이런 학교생활을 하면 한국 사람들이 흔히 얘기하는 ‘스트레스’라는 개념이 형성될 수 없다.

이 얘기를 하면, 남편은 옆에서 자기네들도 ‘국민교육헌장’이란 걸 아침마다 외워야 조례가 끝나고 수업을 시작했다고 하면서 웃는다. 요즘의 한국 중고교 학생들이 옛 국민교육헌장을 모르듯이 지금의 몽골 학생들에게 ‘땅다람쥐 숙제’는 칭기즈칸 때의 옛날 얘기쯤으로 들릴 것이다.

한국에 와서 처음 해본 자원봉사, 지방의회 활동, 사회단체 활동, 그리고 고3 학부모 생활을 거치면서 이제 스트레스가 뭔지 설명할 수 있다. 어쩌면 ‘아주 잘’ 설명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몸살, 이것도 마흔 줄에 접어들며 체감했다. 학교 과제인 연구보고서를 쓰느라 늦도록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엄마가 안쓰러웠는지 아들이 방에 들어가면서 주스 한 컵을 슬며시 놓고 간다. 땅다람쥐 숙제를 하려고 온 들판을 쏘다니던 때도 즐거운 시절이고, 사회주의 시절은 요즘의 치열한 경쟁과 스트레스가 거의 없는 시절이었겠지. 하지만 지금의 바쁜 생활과 스트레스, 그리고 가끔씩 겪는 몸살도 그 나름의 재미가 있고 해볼 만한 생활이 아닐까. 아들의 주스 한 컵에 너무 감동을 받은 것일까.

이라 몽골 출신 다문화여성연합 대표
#몸살#스트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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