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원의 정치해부학]국민이 ‘書面 대통령’을 뽑았던가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8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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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원 논설위원
박성원 논설위원
“개미와 코끼리가 결혼한 첫날밤에 코끼리가 개미 귀에 대고 뭐라 속삭이자 개미가 졸도를 했어요. 그 속삭인 말은 ‘나 같은 아들 하나 낳아줘’였답니다.”

좌중에 폭소가 쏟아지게 만든 유머를 소개한 사람은 박근혜 대통령이다. 한 달여 전 제헌절 때 헌정회 임원진 20여 명을 청와대로 초청한 오찬 자리에서였다. 모처럼 얼굴을 마주한 박 대통령이 분위기를 풀자 참석자들은 “친구들을 자주 만나보라”는 조언에서부터 유라시아 물류협력, 통일 준비, 중소형 원자로 수출 등 다양한 정책 건의까지 스스럼없이 쏟아냈다.

대면보고 꺼리는 이유는


그런 대통령이 정작 긴밀한 대화 소통이 필요한 위기관리 상황에선 왜 어김없이 답답한 커뮤니케이션 패턴을 반복하는 것일까. 4일 비무장지대(DMZ)에서 군 부사관 2명이 북한의 목함지뢰 도발로 다리를 잃는 중대사태가 발생했을 때 박 대통령은 정작 한민구 국방부 장관과 통화 한번 하지 않았다. 김관진 국가안보실장으로부터 4차례 서면 또는 유선으로 보고를 받았지만 5분 거리의 사무실에 있으면서도 얼굴 마주보고 논의하는 대면보고는 없었다. 사건 발생 당일 저녁 북한의 소행일 가능성을 확인하고 청와대에 보고했다고 국회에서 답변했던 한 장관은 청와대가 부인하자 “5일 오후 보고한 걸 착각했다”고 말을 주워 담았다.

박근혜 정부 들어 처음으로 우리 영토에서 발생한 북한의 직접 공격 정황을 파악하고도 하루간이나 보고를 늦췄다면 한 장관은 즉각 파면해야 한다. 한 장관이 지체 없이 청와대에 보고했음에도 김 실장이 대통령에게 하루 늦게 보고했다면 김 실장은 그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다. 대통령과 참모 간의 즉각적 전면적 소통이 이뤄지지 못함으로써 2010년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도발 이후 공언(公言)한 도발원점과 지휘·지원세력 타격은 빈말이 됐다.

도발 지원세력에 해당하는 북한군의 감시초소(GP) 하나 건드리지 못하고 골든타임을 놓쳐버린 안보 컨트롤타워의 작동 장애는 지난해 세월호 참사 때 대통령이 대면보고 한번 없이 서면·전화 보고만 받았다는 ‘7시간 논란’ 때도 문제로 지적됐다.

친박(친박근혜) 인사들 가운데는 박 대통령이 대면보고를 선호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1979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대면보고를 선점해 귀를 장악했던 차지철 경호실장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이도 있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장차관은 물론이고 필요하면 주무 국장 과장도 수시로 불러 브리핑을 듣고 질문을 했지, 서면이나 전화에 붙잡혀 있지 않았다.

위기대응 스타일 확 바꿔야


박근혜 정부의 입법부와 행정부 고위직에 있었던 인사 가운데 재임 중 대통령과 단독면담은커녕 전화통화 한번 못했다는 인사들이 의외로 많다. 한 정부 고위직 출신은 “비서실장이 들어와 앉아 있던 것을 독대로 알았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최근 청와대 내부회의에서 “임기반환점(25일)을 앞두고 뭔가 새로운 과제를 내놓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그날엔 다른 해가 뜨나요?”라며 초지일관을 당부했다고 한다. 그날부터는 해가 서쪽에서 뜨는 것처럼 박 대통령의 위기대응 스타일이 확 바뀌었으면 좋겠다. 북한뿐 아니라 심상찮은 환율전쟁 같은 경제위기 상황에서도 국민은 서면대통령이 아니라 직접 참모들, 전문가들과 얼굴을 마주보고 호흡을 함께하며 위기를 돌파하는 대통령을 보고 싶어 할 것이다.

박성원 논설위원 swpark@donga.com
#박근혜#위기관리#서면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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