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림펜스의 한국 블로그]예약 실수 너그럽게 봐준 펜션 주인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6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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림펜스
지난달 부모님이 한국으로 여행을 오셨다. 첫 번째 방문은 2006년이었다. 너무나 진부한 표현이지만 ‘세월이 참 빠르다’. 두 번째 방문까지 9년이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나갔다. 2006년에는 부모님과 함께 일주일 동안 경상도와 강원도에 다녀왔는데, 이번에는 남해 쪽으로 다녀왔다. 부모님은 5월 1일 한국에 도착했고, 그 다음 날 함께 전남 여수로 날아갔다.

5월 초는 징검다리 연휴여서 하루만 연차를 내도 5일까지, 즉 3박 4일을 여행할 수 있는 이상적인 기회였다(문제는 나만 그 생각을 한 게 아니란 점이다). 5일 밤 여수∼서울 기차표는 미리 예매해 놓았지만, 숙박은 예약하지 않고 그날 바로 찾아보기로 했다. 부모님은 한국 연휴가 얼마나 바쁜지 몰랐기에 나를 믿고 걱정하지 않으셨다. 나는 국내 여행자가 많을 줄 알면서도 계획도 없이 부모님을 모시고 다닐 정도로 낙천적인, 아니 철없는 아들인가 보다. 토요일 여수에 도착한 뒤 숙소를 알아보니 관광호텔들은 모두 꽉 찼다(당연하지). 다행히 시내에 나가 아슬아슬하게 마지막 빈 모텔 방을 찾아냈고 막바지 렌터카도 운 좋게 구했다.

일요일 아침엔 차를 타고 순천 송광사에 갔다. 한국 절은 비가 올 때도 매력적인 것 같다. 이후 식당에서 빈대떡을 사 먹고 지도를 다시 살펴봤다. 다음 날 가려 했던 경남 남해 쪽에 사람이 많을까 싶어 예약할 펜션을 검색했다. 열 번이나 전화를 걸었지만 열 번 다 방이 없단 말을 들었다. 그러나 열한 번째 시도 땐 나의 희망을 부활시켜 주는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었다. “네, 하나 있습니다”란 긍정적인 답이었다. 주저 없이 예약을 하고 저녁까지 방값을 송금하기로 했다. 전화를 끊고 부모님께 자랑스럽게 발표했다. “인내심을 갖고 찾아보면 좋은 방을 구할 수 있겠다고 말했잖아. 내일은 아름다운 남해의 ‘해모로’ 펜션에서 묵는다!”

그날 오후엔 경남 진주에 가서 문제없이 별 특징도 없는 모텔 방을 찾았다. 월요일 오전, 화사한 하늘 아래 일찍이 통영과 거제도를 경유해 오후 5시쯤 삼천포대교를 건너 남해군에 도착했다. 예약했던 펜션의 자세한 위치를 확인하려고 다시 검색해 보니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펜션 웹사이트가 두 개나 나온다.

‘해모로’라는 펜션이 두 개가 있나 보다. 하나는 남해, 하나는 강원 강릉. 내가 어제 하도 기뻐서 서둘러 예약해 놓은 방은 남해가 아니라 강릉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맙소사.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부모님께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전 강릉 펜션 주인한테 전화를 걸었다. 그 분의 입장을 생각해 보자. 곧 저녁인데 손님한테서 전화가 와서 ‘지금 남해에 있다’고, ‘헷갈려서 예약을 실수했다’는 말을 듣는다. 실수한 입장에선 주인으로부터 “유감스럽지만 예약을 취소하기엔 너무 늦었다”는 말을 듣는 게 가장 이해가 갈 상황이 아닌가? 바보같이 주소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으면 그건 손님 탓이지 않나. 유럽 같았으면 이렇게 추론했을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펜션 주인은 내 말을 듣더니 망설이지도 않고 어제와 같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떡하지? 알겠다. 환불해드리겠다”고. 나는 ‘미안하다, 죄송하다, 감사하다’고 사과하고 또 사과했다. 이날은 전화를 끊고 부모님께 자랑스럽게 발표할 게 없었다. 상황을 그냥 설명했다. 부모님은 펜션 주인이 그렇게 아량 있게 대한 것을 두고 놀라워하고 또 대단해하신다. 나는 한국에 살다 보니 그런 고결한 태도에 이미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그 때문에 펜션 집 주인의 관대함이 그다지 놀랍지 않았고, 이런 나의 반응을 보고는 오히려 부모님이 신기해하셨다. 평소 나는 부모님에게 ‘한국은 친절하고 마음씨가 고운 사람이 많다. 그래서 훈훈한 경험을 하기 좋은 나라다’라고 얘기한 적이 있어 부모님도 이미 알고 계셨지만, 그날은 이 사실을 다시 한번 인상 깊게 체험하신 듯했다.

결국 우리 가족은 펜션 대신 또 모텔에서 묵게 됐다. 무척 촌스러운, 하지만 바다가 내다보여 전망이 참 좋은 방을 찾아냈다. 화요일 아침엔 여수로 돌아가 그날 저녁 KTX를 타기 전 향일암, 그리고 금오도까지 갔다 올 시간이 있었다. 우리 부모님은 이번에도 아름다운 여행을 했다(파주출판단지에 온 날 타신, 붐비는 2200번 버스 안을 제외하고). 나는 이번 여름엔 강릉 쪽으로 한번 놀러가 볼까 생각 중이다. 숙박은 별로 고민할 필요 없을 것 같다. 생각하고 있는 펜션의 전화번호가 이미 저장돼 있다.
※벨기에 출신인 필자(39)는 벨기에 명문 루뱅대 법학과와 브뤼셀 KUB대 대학원을 졸업했다. 김&장 법률사무소에서 근무하다 현재 출판사 열린책들 해외문학팀 차장으로 근무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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