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자의 생각돋보기]우정인가? 동성애인가?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4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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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로클로스에게 붕대를 감아 주는 아킬레우스.
파트로클로스에게 붕대를 감아 주는 아킬레우스.
영화 ‘트로이’에서 늙은 왕 프리아모스가 한밤중에 적장 아킬레우스(브래드 피트)의 막사를 몰래 찾아가 아들의 시신이라도 돌려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은 가슴 뭉클한 장면이었다. 헤겔의 미학에서도 이 장면은 아주 중요한 모티프다. 그는 인간의 파토스(정념)가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이 고사에 주목했다. 그에 따르면 한 인물 안에 다채롭게 펼쳐지는 인간의 다양한 감정이 바로 파토스인데, 아킬레우스가 바로 그 전형적인 인물이다. 전날 복수심에 불타 헥토르를 죽이고 그 시체를 전차에 매단 채 트로이의 성벽을 세 번이나 돌 때의 아킬레우스는 극도의 성마름과 흥분을 이기지 못하는 혹독하고 잔인한 사나이였다. 그러나 바로 그날 밤 헥토르의 아버지가 막사로 찾아왔을 때, 비록 자기가 그 아들을 죽인 장본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노인의 슬픔에 공감하며 진심으로 위로한다. 아들의 죽음 앞에서 피눈물을 흘리는 이 불쌍한 노인이 고향에 있는 자신의 늙은 아버지를 생각나게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애당초 그가 헥토르를 죽인 것은 절친한 친구 파트로클로스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였다. 그러니까 그는 우정과 노인에 대한 경외심, 또는 아들 잃은 아버지의 슬픔에 대한 공감 등 다양한 감성을 두루 지닌 해맑은 청춘이요, 발 빠른 용사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잔인하기 짝이 없는 심성의 소유자였다. 헤겔은 이처럼 다양한 정념의 소유자가 고귀한 인간이며, “아킬레우스야말로 진정한 인간”(‘미학 강의’ I권)이라고 했다.

죽음까지 넘나드는 이 강렬한 우정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것은 곧 동성애라는 것을 우리는 플라톤에서 읽을 수 있다. 그는 남자들 간의 지성적인 사랑이 젊은이에게 분별력을 심어주어, 불명예스러운 일을 부끄러워할 줄 알고, 명예로운 일에 몸 바칠 줄 아는 인간으로 키워준다고 했다. 이런 덕성이 국가나 개인의 차원에서 위대하고 훌륭한 일을 성취하는 원동력이라고도 했다. 그러면서 아킬레우스의 고사를 인용했다. 헥토르를 죽이지 않으면 집에 돌아와 천수를 누릴 것이라고 어머니가 예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애자(愛者) 파트로클로스를 도와주러 전장으로 나갔고, 파트로클로스가 죽자 헥토르를 죽임으로써 그 복수를 하였으며, 마침내 애자의 뒤를 따라 용감하게 최후를 마쳤다(‘향연’). 소년애와 애지(愛知·philosophy)라는 두 관습이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구절에서는 고대 그리스에서 동성애가 단순히 성적인 욕망의 문제가 아니라 철학의 지위에까지 올라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성애자인 푸코가 말년에 왜 그토록 고대 그리스에 심취했었는지 조금 알 것 같다.

최근 한 필자가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의 관계를 동성애가 아닌 단순한 우정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보고 머리가 갸우뚱해졌다. 그는 두 역사적 인물의 관계를 동성애로 의심하는 것 자체가, 모든 것을 에로틱한 욕망으로 몰고 가는, 현대의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통념의 소산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근대와 더불어 ‘사회적 관계로서의 우정’은 사라지고 동성애를 사회 문제로 취급하는 현상만 남았다는 푸코의 말을 인용했다. 그러나 푸코가 말한 ‘우정’은 동성애와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라 ‘동성애 안에 들어있는 남성들 간의 우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동성애가 상류층 남자들 사이에 만연했던 것은 자본주의라는 말조차 없던 고대 그리스에서였다. 조그만 왜곡들이 모여 거대한 자본주의 비판으로 이어지지 않을지 걱정되었다.

박정자 상명대 명예교수
#트로이#프리아모스#아킬레우스#파토스#파트로클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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