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자의 생각돋보기]금수저의 정신분석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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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저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디즈니 공주들. 디즈니 홈페이지 제공
금수저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디즈니 공주들. 디즈니 홈페이지 제공
“우리 엄마 아빠는 내 진짜 부모가 아닐지 몰라. 아마 나는 굉장한 집 자식인데 어떻게 잘못 돼서 이런 가난한 집에 맡겨져 키워지고 있을 거야.”

어린 시절 누구나 잠시 생각했을 법한 이런 ‘허구의 가족사’를 프로이트는 ‘가족소설’(프랑스어는 ‘roman familial’, 영어는 ‘family romance’)이라고 명명했다. 어린이 신경증 환자들이 자기 부모를 친부모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데에 흥미를 느꼈던 프로이트는 처음에는 이 허무맹랑한 거짓말을 병리학적 징후로 간주했다. 그러나 그는 차츰, 인간은 누구나 어린 시절에 그런 이야기를 의식적으로 지어낸다는 것, 하지만 어른이 되면 그 허구의 이야기를 스스로 억제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 현상은 모든 어린이가 겪는 정상적이고 보편적인 경험이었던 것이다. 다만 어른이 되어서도 그것을 계속 믿고 집착한다면 그것은 병리적 현상이 된다.

‘가족소설’이란 결국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그렇듯이 인격 발달 과정에서 부딪치는 하나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인간이 동원하는 상상의 기제이다. 인생의 최초 단계에서 부모는 아이에게 절대적인 존재다. 부모 역시 아이에게 절대적인 사랑을 베푼다. 그러나 동생이 태어난다든가 해서 이때까지 혼자 독차지하던 가족의 사랑이 상대적으로 약해진다면, 아이는 자신이 부당하게 뭔가를 박탈당했다는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이 감정적인 실망과 굴욕감이 부모에 대한 그의 절대적 신뢰를 비판으로 돌려놓는다. 마침 지적 능력도 발달하면서 관찰과 비교를 통해 그는 자신의 어머니 아버지만이 이 세상에서 유일한 부모는 아니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게 된다. 게다가 다른 많은 부모가 자신의 부모보다 훨씬 더 훌륭하고, 훨씬 더 재산이 많고, 훨씬 더 높은 신분을 갖고 있다는 것까지 알게 된다. 부모에 대한 맹목적인 숭배는 이제 끝났다.

이 첫 번째 실망을 극복하기 위해 아이가 의존하는 기제가 바로 ‘가족소설’이다. “나는 이런 집에서 살 사람이 아니야. 내게는 어떤 탄생의 비밀이 있을지 몰라”라고 아이는 상상의 스토리를 꾸며낸다. 이는 사실 자신의 보잘것없는 태생과 제대로 사랑받지 못한 수치심을 만회하기 위한 하나의 우화와 다름없다. 이 허구의 이야기가 아이에게는 위로와 복수의 수단이 된다. ‘모든 소설은 가족소설이다’라는 문학이론도 여기에서 나왔다.

아이가 빈한(貧寒)한 자기 집과 상류 계급의 어느 가족을 대비시킨다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인간 심리의 개체 발달과 신분 상승의 욕구라는 사회적 주제가 한데 통합되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20세기 초 오스트리아의 부르주아 계급 가정에 국한되는 이야기다’라는 가설이 설득력을 갖는 대목이다. 이때 ‘부르주아 계급’이란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부자 계층이 아니라, 귀족 계급을 영원히 선망하는 중류 계급으로서의 한 계급의 이름이다.

운이 따르지 않아 사회에서 부당하게 취급되고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요즘 젊은이들의 이른바 ‘금수저’론은 ‘가족소설’의 역(逆)이미지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사회 문제라는 큰 틀에 넣음으로써 부모에 대한 부정이라는 죄의식에서는 벗어났지만 결국 부모 잘못 만나 자신이 괴로움을 당한다고 생각하는 방식은 여전히 또 하나의 ‘가족소설’이기 때문이다. 이 단계에서 빨리 벗어나는 것만이 개인적으로는 건강한 인격체, 사회적으로는 성숙한 공동체가 되는 길일 것이다.

박정자 상명대 명예교수
#금수저#가족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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