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시선/현의송]韓日 ‘소나무 우정’이 주는 교훈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3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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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의송 전 농민신문 사장
현의송 전 농민신문 사장
한국과 일본 두 나라는 지리적으로 무척 가깝지만 정서적으로는 결코 만만치 않은 거리를 두고 있다. 축구와 야구 등 스포츠는 흡사 전쟁과 같은 열기를 띠어, 선수들이 승패에 따라 영웅이 되기도 하고 역적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최근 우리는 한국인과 일본인이 국적을 떠나 서로 얼마나 깊은 우정을 쌓고 존중할 수 있는지 생생하게 목격했다.

평창 겨울올림픽에서 금메달과 은메달을 나눠 가진 일본 고다이라 나오 선수와 한국 이상화 선수는 승부가 결정된 뒤 어깨동무를 하고 빙판을 돌았다. 이상화가 일본에 가면 고다이라가 돌봐줬고, 고다이라가 한국에서 경기를 마치고 출국할 때 이상화는 공항으로 가는 택시를 잡아 택시비까지 내줬다. 빙판에서 상대보다 한 발짝이라도 앞서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지만, 그 경쟁 자체가 단순한 승부욕을 넘어 서로 존중하고 격려하는 방식이었다.

조금 다르면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나 하면, 전남 영암에서는 요즘 적송 한 그루가 화제가 되고 있다. 영암중학교 교정에 우뚝 서 있는 교목 소나무는 1932년 4월 1일 일본인 효도 가즈오(兵頭一雄)가 심은 것이다. 그는 영암에서 간척사업을 하면서 직접 농장도 경영해 전남도 의원까지 지낸 실력자였다.

당시 영암에 거주하는 일본인 친목회인 ‘영암회’ 자료에 교사 나카노 미노루(中野實)는 효도를 “그의 영농 목적은 일본의 식민주의와 모순이었다. 영농을 중시하면 예속 농민이 수탈의 결과 피폐해지고, 농민의 자립을 중심에 두면 농장 경영이 어려워질 것을 걱정하는 이상주의자였다”고 기술했다.

나카노도 자료 말미에 “오래전 일본이 조선에서 훌륭한 문화적인 선물을 받아 그것을 피와 살로 삼아 오늘날을 살고 있으면서, 조선과 조선인의 문화를 이해하려 하지 않고 있으니 참괴(慙愧·매우 부끄러워함)스러워 참을 수가 없다”고 적었다.

효도가 영암중학교에 사쿠라(벚꽃)가 아닌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소나무를 심었고 조선 농민의 수탈에 고뇌했으며, 나카노가 조선의 문화를 숭상했다고 해서 일본의 식민지배가 정당화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엄혹한 시절에도 조선인의 처지를 걱정하고, 부끄러워하는 일본인들이 있었던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광복이 되자 효도와 나카노는 일본으로 돌아갔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영암 사람들은 왜 효도가 심은 소나무를 베어버리지 않고 놔둔 것일까. 바로 앞에 보이는 월출산에도 소나무가 지천으로 자라고 있으니 특별하게 여겨지지도 않았을 텐데 말이다. 혹시 영암 사람들은 효도가 일본 사람이기는 해도 미워할 수만은 없었던 것 아닐까.

이 소나무를 효도의 외손자인 오카다 유스케(岡田裕介) 씨가 매년 찾는다. 오카다 씨는 일본의 유명 배우이자 영화사 회장으로서 많은 사람들이 추앙하고 있다. 그는 영암을 방문할 때마다 적송을 통해 외조부의 숨결도 느끼고, 일본에 문자를 만들어 주고 학문을 전수한 백제인 왕인 박사를 배출한 영암의 문화도 향유할 터이다. 소나무 한 그루가 한국과 일본의 가교가 되고 우정의 매개가 되고 있는 것이다.

문득 한국과 일본의 현실을 생각해 본다. 두 나라가 언제까지나 과거에 발목이 붙들려 반일(反日)이니 혐한(嫌韓)이니 하며 다투기만 한다면 동반자적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지 않을까. 이상화와 고다이라가 빙판에서 다진 우정, 일본인이 심은 영암중학교 적송이 전하는 메시지에서 한국과 일본, 그 우정의 가능성을 본다.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가까운 두 나라가 서로에 대한 이해의 뿌리를 깊이 내리면서 미래를 향해 질주하기를 기대한다.
 
현의송 전 농민신문 사장
#평창 겨울올림픽#고다이라 나오#이상화#나카노 미노루#소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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